그날도 여전히 분주한 일요일이었는데 미사시간에 시종일관 침울한 모습을 한 한 학생을 주시할 수 있음도 주님의 보살핌이라고 인정하고 싶다. 다른 학생들이 소리와 마음을 높여 주 날개 밑을 부를 때도 성가 책을 펼치지 않는 그 애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또한 그 애를 앞에 두고「예언자 아모스」에 대해 이야기한 교리시간도 맥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리가 끝나 드디어 내가 데이트를 청했는데(?)망설이던 그 애는 두서없이 짜깁기 하여 늘어놓는「나의여고시절과 방황」을 듣고선 금새 진지한 눈빛을 던져 주었다. 난 바로 이때 다 싶어 집요하게 다가섰는데, 『선생님예 세상사람들이 전부 미워예! 두려워져예 그래서 저는 학교졸업하고 수녀원에 갈거라예』
그래, 문제는 그것이었다.
이제 겨우 17살 난 그 애에게도 세상의 공해는 미흡하나마 불가항력적으로-그 어떤 형태로든-다가오고 있었고, 그 애의 가슴속 깊이 자라고 있던 화초가 숨 가쁜 호흡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여리게 분노하고 있는 그 애 앞에서 이제 발가벗게 된 이 세상에 난 또 다시 꿈과 같은 베일을 씌울 수는 없었다. 누구나 다 어릴 적부터 세상이란 곳에 대해 추상적인 낭만을 지니면서 자라게 되고 나이가 들게 되면서 온갖 상징을 벗어난 실질적인 삶을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친 상처가 하나의 훈장처럼 느껴지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란 힘든 곳이란다. 갈수록 낯설기만 한 곳이고. 또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는 이 삶도 안락한 꿈만이 존재하지는 않아. 때론 춥고 덥고 힘들더라도 여린 손을 서로잡고 걸아가야 하는 거야. 두려울수록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따스한 심장만큼은 강직하게 자녀야 할 것 같애. 성소의 길도 사랑에 있단다. 두려움에 도피해버리는 비굴한 선택이 아닌 도리어 이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에 있는 거란다. 자유를 선택하는 용기와 같은…』
교리교사 11개월 동안에 쌓은 관록과 신앙으로 말한 어설픈 조언을 그 애는 묵묵히 듣고는 있는지…
그리곤 대답이라고 하는 듯이『고마워 예』라고 말하면서 뒤돌아서는 그 애의 뒷모습에 저녁 어스름이 어느새 가라앉기 시작했고 환청으로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엘리사벳, 이제 곧 장마철이 다가오는데도 목이 마르구나』라는.
김선영<대구시중구 남산2동 2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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