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내린 뒤였다. 나는 교장수녀의 책상위에 사직서를 올려놓았다. 그녀는 의아한 듯 잠시 그것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무더운 날이었다. 방학이어선지 성당 쪽으로 나있는 오솔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교장실 창밖 조금 멀리에 서있는 느티나무가지위에 새들이 앉아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교장수녀의 손가락 끝에서 사직서가 펼쳐졌다. 그녀가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잎새 하나 흔들리지 않는 느티나무를 스치며 새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읽기를 끝낸 교장수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기록카드를 가져왔다. 그녀는 그것을 책상위에 내려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연신 땀방울이 맺히는 그녀의 이마위에 희끗희끗 세기 시작한 머리카락 몇 올이 머리 수건 사이로 언뜻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보자 문득 알지 못할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기실 잔설처럼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박 교수를 볼 때마다 느껴지던 것이었다. 그의 연구실에서 책상위에 무언가 용건을 올려놓고 말없이 그의 처리를 기다릴 때면 엄습해오곤 하던, 어떤 두렵기조차 한 엄격함 같은 것이었다.
졸업을 앞둔 그해 이월이었던가. 지금 사직서를 제출하고 서 있는 이 여자고등학교에 이력서를 내기위해 추천서를 받으러 간적이 있었다.
밝은 겨울날 오후였다. 햇빛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땅에서 허연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연구실밖에 외투를 벗어놓은 채 한껏 예의를 갖추고 연구실로 들어갔다.
연구실은 썰렁했다. 박 교수는 난롯불도 지피지 않은 채 낡은 외투에 쌓여 무슨 책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추위로 빨개진 코끝을 들어 웬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책상위에 추천서용지를 내밀었다.
『선생님께 추천서를 받았으면 합니다』박 교수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나중에는 무슨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추천서라고』
그가 나즉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추천서라면 다른 교수님께 가보지』나는 한동안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게 추천서를 써줄 권한이 없다는 것인지, 내가 추천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인지 혹, 이도저도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인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난감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저는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습니다』박 교수가 표정 없이 내 눈을 마주 쳐다봤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폈다. 머리칼에 희끗희끗 잔설이 덮이기 시작한 육순의 나이, 우직한 성품으로 원칙이외의 더 이상의 어떤 타협도 거부하는 노인의 표정 없는 시선에서 오는 고집스러움이 점차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선생님』무슨 생각에서인지 박 교수가 눈을 내리감았다. 창 가까이 바람이 지나갔다. 어느새 기웃한 해가 연구실 깊숙이 햇살을 들이밀고 있었다.
『선생님, 대체 왜-』그러나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 같은 제자 둔적이 없네』나는 멈칫했다. 그건 무슨 뜻인가. 다음순간 나는 어떻게 입을 열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멍청하게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무심코 한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책상을 짚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를 알고 싶습니다』손끝이 시렸다. 기온이 내려갈 무렵이어선지 남아있는 햇살마저 싸늘했다. 외투를 벗어놓고 들어온 것이 괜한 짓인 듯싶었다.
『선생님』『자네는 나를 스승이라 생각하는가』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곧 자세를 추스리고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한 번도 그를 스승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원칙론 앞에서 많은 학생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화를 낼 때에도 나는 늘 그의 완고하면서도 당당한 태도에 존경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학년 일 학기, 학생들이 한참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거리로 뛰쳐나갔을 때 나는 그가 빈 강의실에 혼자 서서 그가 말고 있던 예술론 강의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를 미쳤다고 매도했지만, 나는 실로 감동에 가까운 신뢰와 존경심을 맛보고 있었다. 더욱이 시위에 관련해 징계처분을 받게 된 과학생을 그가 열렬히 옹호했던 일은 또 얼마나 우리를 혼란한 뜨거움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던가.
찬찬히 나를 바라보던 박 교수가 이윽고 말했다.
『가보게』바람이 가볍게 창을 흔들고 나갔다. 회색빛 하늘에 번지지 시작한 노을이 연구실 저편 자작나무 숲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허경선, 자네는 내 추천서 없이도 그 학교에 취직할 수 있을 걸세. 자네의 실력은 누구라도 인정할테니』그의 목소리는 눅눅하게 젖어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거기에서 그의 감정을 읽어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저는 선생님의 추천을 받고 싶습니다』『그건 안 되네. 가보게 그만』『왜 안 된다는 거지요?』그는 다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흔들리지 않는 굳은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던 박 교수가 한참 만에 엄격함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분명 훌륭한 학생이네 성실하고 재능 있는, 게다가 자네는 소신대로 행동할 줄도아네. 나는 그런 자네를 좋아하네. 그러나 자네의 소신을 펴는 그 방법론은 찬성을 할 수가 없네. 이를테면 자네가 운동권 학생들의 물주였을 때라든지, 대자보의 삽화를 그렸을 때라든지』『선생님, 그건…』『그건 그렇게 나쁜 방법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겠지 자넨. 혹은 어쩔 수 없었다고 . 그렇네. 어쩌면 내가 자네 입장이었더라도 그랬을 런지 모르네. 그러나 자네가 대준 돈이 결과적으로 수업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데에 쓰였다는 과연 자네가 취한 행동이 정당한 것이라 할 수 있는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어떠한 경우라도 옳은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론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네. 가장 원칙적인 것을 주장하는 자네들이 그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업을 거부하고 연구실에 못질을 했을 때 나는 자네들을 향한 내 가슴에 못질을 했네. 또한 자네가 대자보에 삽화를 그린 행위를 용납할 수 없네. 자네가 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네. 순수해야 할 예술을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네. 그것이 어떤 좋은 목적을 위한 것이었든지 다른 것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예술과는 위배되는 것이네. 내가 한 개개인의 존재로서 자네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제자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네. 그때 이미 자네들이 나와의 사제관계를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네. 물론 자네도』『그렇지만』『가보게』박 교수의 얼굴에 무겁고 그늘이 내려앉았다. 바로 그 일 때문이었다. 마지막 학기, 거리에서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이제 총장 이하 어용 교수 퇴진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때 나는, 그동안의 대회 때마다 번번이 특선을 받아온 덕으로, 요행히 학교에서 주는 공로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나는 몽땅 배고픈 동료들을 위한 헌금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어떤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레 생긴 많은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망설이던 판에 동료들을 위해 헌금을 하자는 구호는 다소 매력적으로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거의 충동적으로 그 돈을 모두 내놓았던 것이다.
반명 대자보의 삽화는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 어떤 공간에서든 자유자제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내게 대자보가 갖고 있는 공간이 흥미로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나의 주관심사는 대체로 그림과 그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과의 연계성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예술에 대한 엄격성 앞에 선박교수에게 수업을 받은 제자로서 경솔한 결정이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자작나무숲 가까이 새 한마리가 내려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불자 새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듯 날개를 퍼덕였다.
제자리를 지키고선 채 바람에 부딪고 있는 새를 바라보다가 나는 얼른 자세를 정돈했다.
『알겠습니다. 그것 때문이라면 더 이상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건강하십시오』나는 박 교수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때까지 그는 아무표정도 없이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렇게 연구실 문을 열었다.
『잘가게』그때였다. 내 등을 미는 나즈막한 박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잔설처럼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노을빛을 받으며 박 교수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역광을 받고 있어서 침침한 눈가에서 무엇인가 축축한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깊숙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와서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정 그렇다면 허 선생님, 사직서를 수리하도록 하겠습니다』교장 수녀가 내 인사기록카드를 들여다보다가 탁 소리가 나도록 힘주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나는 교장수녀의 이마에서 얼른 시선을 떼고 무심히 서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타이머가 다 돌아간 선풍기가 푸르르 멈춰버렸다.
『아시겠지요』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않느냐는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표정이 딱딱하다고 생각했는지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그녀가 겨우 미소를 지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조금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느릿느릿 교장실로 나섰다.
교무실로 향하는 복도 깊숙이 오통 햇빛이 밀려와 있었다.
교무실 앞에 왔을 때 나는 누군가가 자박자박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가볍게 흩어지는 바람소리에 섞여 들려오던 발자국 소리가 햇빛 속으로 들어와 뚝 멈췄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명제였다. 빛을 등지고 선 명제의 주위에선 갈꽃이 일렁이는 듯한 선연함이 감돌았다. 명제의 얼굴은 사루비아처럼 빨갛게 그을려 있었다. 명제가 살그머니 웃어보였다.
볼우물이 패이면서 그 아이의 웃음소리가 햇빛을 타고 넘실넘실 다가왔다. 나는 명제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환영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도 없었다.
무릎까지 오는 몸을 잘 맞는 스커트, 약간 헐렁해 보이는 티셔츠. 생기 있는 눈빛으로 늘 귀엽게 웃던 아이, 그 애를 바라보면 항상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러나 명제는 이제 여기에 없다. 복도는 금새 끈적한 나른함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허경선 선생님, 선생님 반의 윤명제 학생 말입니다』여름방학을 이레 쯤 앞둔 어느 날 교무회의 시간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교감 선생은 그렇게 운을 뎄다. 『착실한 학생인데요. 여러 방면에 소질있구요』『착실하다구요? 그 학생, 지도가 필요하다는 중론인데요』『글쎄요-저는 교감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명제. 글쎄,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러나 나는 짐짓 모르는체하면서 다른 교사들을 슬쩍 둘러봤다. 눈이 마주친 몇몇 교사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회색지대였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그건 허 선생이 더 잘 아시는 일이 아니신가요? 수업시간에 말없이 사라지는 일이 그렇게 빈번해서야』『아, 그 일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 일이라면 담임인 제게 좀 더 맡겨 두시는 것이 우선 좋지 않을까요?』『하지만 그 학생의 행동이 다른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불쑥 날카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학생과정이다. 그는 언제나 교감선생 편이었다.
『물론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 학생의 행동에 대한 질책보다는 오히려 학교측의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령…』『가령, 뭡니까?』『수업시간에 들려오는 총소리라든가 하는』『총소리라뇨?』『총소리요. 유 신부님의 공기총소리 말입니다.』『아, 그거요-』그러자 교사들이 조소하듯 입을 모았다. 학생과장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것이 어떻다든 거지요?』『어떠하냐구요? 학생들의 수업시간에 교정에서 총을 쏘는 신부님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그것이 왜요? 신부님은 총을 쏘면 안 됩니까?』『아니, 그 시간과 장소 말입니다』학생과장은 그에 대해 무어라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제 생각에는』침묵을 깨며 나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건 주제에서 조금 벗어난 얘기일 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사람에겐 총소리가 몹시 고통스러울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연유에서건』『다른 학생들은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요?』『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다른 학생들이 모두 잘 지낸다고 해서 나머지 한 학생이 겪어야하는 고통을 묵과한다는 것은 부당한게 아닐까요?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이 이미 그 앞에서의 반응이 마비된 상태라면 더욱 불행한 일이 아닐까요? 그것이 우리 귀에 하나의 폭력처럼 자행되고 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단지 한 개인의 취미생활 때문에 말입니다』『얘기의 비약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닐까요?』유신부의 공기총소리에 초점이 맞춰지자 교감선생이 나서서 대충 얼버무렸다. 교사들은 그 틈에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좋습니다. 그럼 그 학생의 행동은 좀 더 두고 보도록 합시다』회의는 일단 그렇게 끝났다. 나는 명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사태는 엉뚱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유 신부의 공기총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은 학교 건물 뒤편의 성모통굴 앞에서 발견됐다. 머리 판이 부숴지고 총구가 돌로 짓이겨져 있었다. 그 바로 옆의 느티나무 아래에는 명제가 몸을 잔뜩 움추린 채 엎드려있었다. 꼼작도 하지 않은 명제의 몸체위로 느티나무 잎새가 새의 깃처럼 펄럭이며 커다란 그림자를 덮고 있었다. 잎 사이로 젖어드는 노을빛 속에서 명제는 기묘하게도 막 비상하려는 황금빛 새 같았다.
황혼 속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명제를 보는 순간 나는 내 기억의 심연 깊숙이 단단하게 고리져있던 무엇인가가 꿈틀꿈틀 일어서 걸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짓이겨진 총구처럼 둔탁한 균열과 함께 기억의 덧문에서 조심조심 빗장을 내리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 모였나?』
아직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일종의 유희로써 습자지를 바른 유리창 틈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이 황혼에는 어떻게 변하는가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여름방학 전쯤해선 한 번도 고개를 들이밀지 않는 햇살이 겨울방학 전쯤해선 창가로부터 다섯째 자리까지 밀려들어오곤 했다. 노을빛이 하늘을 적실 때면 유리창마다 제각기 붉은 해가 출렁였다. 그러면 교실은 온통 수십 개의 석양판으로 타오를 것만 같았다.
육학년이 된지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수업은 진작에 끝났고 아이들 몇이 교실에 남아 담임선생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창 가까이에 앉아서 유리창 틈으로 시선을 주었다. 습자지에 닿은 빛들이 창틈을 통해 교실 안으로 비실비실 밀려들고 있었다. 나는 햇빛을 따라 창틈으로부터 시선을 움직였다.
『자!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려라』낮게 고개를 숙이고 제법 깊숙이 밀려온 햇살이 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희들은 내일부터 선생님과 과외공부를 하는거다. 알았지ㆍ』『예』아이들의 대답이 은밀하게 햇살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나는 손등의 햇살을 털어내고는 책상에 내려앉은 햇살위에 다시 손을 덮었다.
『저는 안하겠어요』햇살을 털어내면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과외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 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햇살이 다시금 책상위에 투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햇살위에 다시 손을 덮으려다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무언가 모를 끈끈함과 답답한 고요가 감돌았다. 그제서야 나는 햇빛으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나는 그때마다 그렇게 뜨악한 시선을 본적이 없다. 무언가 불안한 표정, 놀라움과 경멸의 표정, 나는 그 순간 어이없게도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멍청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의외였다. 담임선생이 너그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정작 내게 감당하기 어려울 만치 과중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거의 날마다 매를 맞았다. 동화책을 학교에 가지고 왔다느니 공책이 지저분하다느니 혹은 복장이 단정치 못하다느니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로 유치한 이유들 때문이었는데, 그는 늘 그런 조야한 이유들을 들어 매를 대곤 했다. 그러자니 내 몸은 온통 멍투성이었다,
오월 초였다. 그날 당번이었던 나는 새벽길로 학교에 갔다. 신선한 새벽공기, 누구보다도 먼저 도착한 학교 운동장 한 켠으로 이제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공연히 상쾌한 기분으로 교실에 다다랐다.
교실에는 벌써 누군가가 와 있었다. 나는 같은 당번이라 생각하고 왈칵 문을 열었다. 다음 순간 나는 깜짝 놀라 그만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담임이었다. 담임선생이 한 아이를 끌어안고 그 볼에 입술을 부비고 있었다. 눈을 감고 말없이 서있던 그 아이는 우리들 중에서 꽤 성숙한 아이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고 그대로 서 있었다.
담임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부여잡더니 거칠게 내 상의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곧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손을 저지하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가 바싹 다가섰다. 다음에는 내 양 볼에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몇 차례 세게 지나갔다.
나는 얼굴을 감싸고 몸을 돌렸다. 말없이 지켜보고 서있는 그 아이의 눈동자가 멍청하게 내 얼굴에 닿고 있었다. 그가 다시 내 어깨를 부여잡고 몸을 돌려세웠다. 나는 이제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다가 교실 밖으로 도망쳤다.
뒷산은 따뜻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풀잎에 내려앉아 이슬이 햇빛 속으로 소리 없이 녹아들고 있었다.
나는 마른 풀 위에 앉아 얼얼한 볼을 문질러 주었다. 수목사이를 지나온 바람이 코끝에 향긋한 내음을 전했다. 어느새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뒤덮힌 향기를 헤집으며 무릎걸음으로 걸어 다녔다.
겁먹은 채 나무 밑에 숨어 있었다.
멀리서 수업종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하게 멀리 느껴졌다. 더 멀리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기적소리는 기차가 들을지나 저쪽 산모롱이를 완전히 돌아갈 때까지 꽤 오래도록 울려왔다. 다시금 숲의 고요가 나를 에워싸고 수목 내음이 부드럽게 어루만져졌다. 나는 그제서야 아카시아나무 아래서 쭈그리고 앉아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무언지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기웃이 비춰들었다. 산그늘이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임선생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랐다. 숨죽여 바라보던 아이의 표정 없는 눈동자도 보였다. 또 매를 맞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교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교정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습기간인가 보다. 숨을 헐떡이며 나는 복도 안으로 몸을 디밀다가 주춤 물러섰다. 담임선생이 복도에 서 있었다. 다행히 그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간신히 숨을 가누고 살금살금 운동장 쪽으로 가서 창문을 통해 교실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자습지를 풀고 있었다. 교실안의 동정을 살피면서 나는 조심스레 내 자리 쪽을 더듬어 보았다.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는 교탁위에서 시선을 멈췄다. 가방이 거기 놓여있었다. 나는 그것이 정말 내 것인가를 확인해 볼 양으로 창턱 가까이로 바짝 머리를 끌어 당겼다. 그러다가 그만 머리를 창문 안으로 들이민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고개를 들다가 짤막하게 소리쳤다.
『경-선-』
그러자 아이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화살처럼 빠르고 날카로 왔다. 그에 당황한 나는 그 화살에 심장이 꿰뚫린 들짐승처럼 사납게 창을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교탁위에서 책가방을 집어 들고 다시 창을 뛰어나왔다. 거의 동시에 아이들의 놀라움에 내지르는 탄성, 나를 잡으라고 소리치는 담임선생의 목소리가 뒤죽박죽 들려왔다.
우루루 아이들이 쫓아 나왔다. 아우성, 발자국소리, 내 몇 발자국 뒤에서 씩씩대는 숨소리.
나는 헉헉거리며 논둑으로 내질렀다. 석양이 무논에 부딪쳐 사방에 피처럼 붉게 떠 비쳤다. 아이들은 이제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달려왔다. 나는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첨벙 무논에 발을 들이밀었다. 연분홍 자운영이 개구리밥 사이로 아른아른 흩어졌다. 거머리 몇 마리가 슬금슬금 종아리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훅- 숨을 들이마셨다. 뒤쫓아 온 담임선생이 논가으로 내려서다가 멈칫했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 가까이 다가온 아이들을 바라보며 첨벙첨벙 무논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논가으로 빙 둘러선 아이들의 등 뒤에서 노을빛이 흐벅졌다. 노을 속에서 담임선생이 소리를 질렀다. 『허경선, 이리 나와라.』
소리는 무논을 한 바퀴 돌아서 자운영 꽃잎처럼 개구리밥 사이로 흩어졌다.
『빨리 나와』
『제발』
『경선아-』
그들이 제각기 소리를 질려댔다. 소리들은 한데 뒤섞어 꿀벌 떼처럼 웅웅 거렸다. 숨이 답답했다. 소리의 전장 속에서 사정없이 조각나버릴 것 같았다. 땀이 온몸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나는 책가방을 끌어안은 채 몸을 똑바로 펴고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을 노려봤다. 자못 거만하고 당당하게. 소리가 멈췄다. 자운영을 삼키며 개구리밥 위로 서서히 바람이 일렁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까지 무논에 성큼 발을 들이미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담임선생은 마침내 아이들을 재촉해 학교로 돌아갔다. 아이 하나가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도 결국 발걸음을 끌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이의 등 뒤에서 농익은 황혼이 가라앉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커다란 날개 짓으로 날아오르는 새를 보았다. 새는 긴 그림자를 끌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게 깃털을 떨구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날개를 펄럭거리다가는 땅거미를 이끌고 사라져갔다.
그제서야 나는 조심조심 무논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하기로 하셨나요?』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건넸다.
『네?』
나는 깜짝 놀라 움칠 몸을 움직였다. 그 바람에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던 것들이 섬광처럼 재빨리 기억의 저편으로 돌아가 그 문을 닫고 있었다. 나는 그 문고리를 한손으로 움켜쥐고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일직인 강 선생이 교무실 창으로 삐쭉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학년 국어 담당으로 꽤 유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눈꺼풀이 몇 번 깜박였다. 내 시선이 어설펐던지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표정의 변화가 서서히 진행된 탓으로 그의 얼굴이 나른하게 느껴졌다.
『아, 네에. 이젠 책상 정리하는 일만 남았지요』
강 선생의 표정이 일순 미묘하게 흔들렸다. 동정의 시선인 듯도 하고 조소와 경멸을 감추지 못해 난처해하는 표정인 듯도 하다. 그런 그의 애매모호한 표정은 늘 그의 기민함을 교묘하게 은폐시키곤 했다.
『다시 생각해 볼 수는 없나요?』
그는 은근히 동류의식을 담고 있는 투로 물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무얼 다시 생각해야 하지요? 사직서는 이미 수리하기로 됐는데요』
그러자 그는 잠시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일이 허 선생님께서 꼭 그런 식으로 책임져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까? 그건 전적으로 윤명제 학생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는데요』
나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막 빗장을 걸고 있는 기억의 덧문 저편에서 소란스럽게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잡으려고 애썼다. 무슨 소리들인가가 한꺼번에 떠올라 와글와글하다가 사라졌다. 우루루 마룻바닥에 걸상이 밀리는 소리, 탁탁탁…슬리퍼 끄는 소리, 풍금소리, 그 왁자지껄한 틈새로 이번에는 금속성의 높은 사이렌이 울리고, 갑자기 덧문이 열리며 사방은 일시에 조용해졌다.
이제 나는 고등학교 이학년 때의 내 교실에 앉아 있다. 방금 육교시 종이 울렸고, 음악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음악실로 가 있어야 했지만, 우리들 중에 누구도 음악실로 간 학생이 없었다. 다음 날부터 학기말 시험이었고, 우리들 사이에서는 시험공부를 하고 있자는 은밀한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다.
날은 끈적하고 지리 했다. 여름에 지친해가 운동장 한 가운데서 곤두박질을 하고 있었다. 십분쯤 지났을 때였다. 음악선생이 달려왔다. 거칠게 교실 문이 열리고 우리들은 보던 책들을 후다닥 책상서랍에 집어넣었다. 그가 나즈막하게 그러나 한껏 성을 삭이고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들! 왜 아무도 음악실에 안 오고 있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교실 안에는 삽시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교단을 왔다 갔다 했다. 탁탁탁…슬리퍼 끄는 소리가 불안하게 교실을 돌아다녔다. 그럴수록 교실 안은 점차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에 그는 터리개를 하나 집어 들고는 교탁을 두어 번 내리쳤다. 이어서 우리 모두의 손바닥을 한대씩 때리기 시작했다.
『자 이제 이유를 말해 봐』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노기등등했다. 마음약한 아이들의 눈에서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러나 교실 안에서는 대답은커녕 숨소리 하나 크게 들리지 않았다.
『자, 빨리』
그가 다그쳤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또 다시 매를 들 기세가 역력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그러나 몹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종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잠시 멍청하게 그 아이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 아이를 불러 세웠다.
『그래? 그럼 넌 이리 나와 서라』
그는 다시 매를 들었다. 그 아이를 뺀 우리들 모두에게 또 한 차례 매가 지나갔다. 그가 또 물었다.
『자, 너희들 중에 종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 나와라』
우리들은 무언지 불안함을 느꼈다. 그가 다시 소리쳤다.
『어서』
눈치를 살피던 이이들 몇이 쭈빗쭈빗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이들에게는 또 한 차례 매가 돌아왔다.
『또 종소리를 못들은 사라!』
이번에는 회유하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의외의 태도에 좀 더 많은 아이들이 몰려나갔다.
『자, 너희들 중에 또 종소리를 못들은 사라!』
종전보다 더욱 나즘한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우루루 몰려나갔다.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내 엉덩이도 들썩거려졌다. 묘한 부끄러움이 그때마다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다시 또 매가 지나갔다. 이번에 나나 다른 아이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한 학생뿐이었다. 혜자였다. 평소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혜자는 놀랍게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말간 표정이었다. 음악선생은 말없이 혜자를 바라보면서 잠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숨죽이고 선 아이들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유혜자! 그래, 너는 종소리를 들었는데도 음악실로 오지 않았단 말이지?』
『예 저는 종소리를 들었어요』
『그래? 그렇다면 왜 다른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지』
『그건… 그건 다른 학생들도 아마 종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그가 우리들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백여개의 눈초리가 혜자를 쏘아보았다. 그가 비아냥거리듯 우리들에게 물었다.
『너희들도 종소리를 들었나?』
『아-뇨-』
우리들은 부인했다. 일순 그의 입가에 가볍게 비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결국 혜자는 남은 시간 내내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맞았다.
방과 후였다.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나자 혜자도 절뚝이며 교실을 나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꾸 굽어드는 등이 절망적으로 보였다.
창가에 서서 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느닷없이 바늘에라도 찔리운 듯한 섬세한 고통을 느꼈다.
나는 절대 종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거듭 다짐하다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자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벌써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노을이 운동장너머 낮은 산등성부터 질게 깔려있었다. 그 아래로 바람이 일렁이며 지나갔다. 노을빛이 진진한 하늘 속으로 새 한마리가 날고 있었다.
그는 무르익은 황혼 속에 살아있는 아름다움이었다.
돌연 어디선가 매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매는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곧 바르게 그를 겨냥하여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놀란 새가 황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불숙 내 가슴 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가슴 깊숙이에 그를 숨겼다. 어둠 저편에서 황혼이 그 문을 닫고 있었다.
나는 강 선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 선생이 말없이 나는 바라봤다. 이미 그에게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책상정리를 하기 위해 교무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있는 것들은 몇 권의 책 이외에 지우개 연필 따위의 소모품들이어서 별로 정리할 것도 없었다. 나는 책들만 대충 뽑아 정리하고 미술실로 갔다. 고요했다. 고요는 한줌 재처럼 혹은 유령처럼 가볍고 불안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미술실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놓여 있는 그림 앞에서 나는 눈길을 멈췄다. 명제의 것이다.
미완성의 그림 속에 아이들 밴 여자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귀를 막고 나무 알로 숨어있다. 그 발치엔 한 마리의 검은 새가 총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죽어있다.
명제의 언니라고 했지. 이제 막 스물이 될까 말까 한 앳된 얼굴, 세해전 내가 이 학교에 부임했을 때 졸업생 중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칭찬이 자자하던 아이.
『언니는 대학에 다니다가 이 학년 때 그만뒀어요. 학생시위에 참가했다가 제적당하고 집에 와 있었어요. 그런 어느 날 새벽에 또 낯선 남자들에게 끌려갔는데, 몇 달 후에 돌아왔을 때 이미 배가 볼러 있었어요』
집에 돌아왔을 때는 진작부터 미쳐 있었다고 했지.
『언니는요, 집승처럼 방안을 기어 다니며 으르렁댔어요. 아버지는 언니를 방에 가두고 열쇠를 채워버렸어요. 언니를 미워했어요. 언니는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쳤어요. 아버지는 아무도 열어주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요, 제가요 문을 열어줬어요. 그런데 그만…언니는 아버지의 엽총을 훔쳐내 머리를 쏴 버렸어요. 언니는 피투성이였어요. 총상 입은 새 같았어요. 싫어요. 저 총소리, 저 총소리…』
명제가 울부짖었다. 여자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허공에 매달려 같이 울부짖고 있었다.
헉! 나는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갑자기 공기마저 차단된 밀폐된 육면체 속에 갇혀버린 듯 답답해졌다.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지만, 밖에서는 안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공간이었다. 그것은 시시각각 좁혀들고 있었다. 나는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그림에서 얼른 시선을 거두어냈다.
『한동안 붓을 잡기가 힘들거야』
나직이 중얼거리며 나는 주섬주섬 화구들을 챙겼다. 놓여있던 그림들을 모아들고 소각장으로 갔다. 나는 그것들을 몽땅 소각장에 던지고 성냥을 그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깃털이 파란 새가 하나 파닥거렸다. 나는 가슴을 열고 새를 꺼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모아들고 조심스럽게 새를 놓아 주었다. 새는 손바닥에서 몇 번 파닥거리다가 파르르 깃을 채더니 천천히 날아올랐다.
『잘가게』
갑자기 내 귀에 뜻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부드럽게 내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박 교수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불현듯 내 기억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문고리를 잡은 채 서 있었다. 다음순간 나는 그 문빗장을 활짝 열어 제끼고 그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무논에 성큼 발을 들이밀 때처럼. 거머리가 달라붙는지 혹은 내 몸 어디에서 깃털이 돋고 있는 것인지 온 몸이 근지럽다.
어깨너머로 검은 새 한마리가 푸드득 지나갔다. 등 뒤에서 막막한 고요가 덮쳐왔다. 황혼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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