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살던 곳이 산골이나 시골은 아니지만, 거의 시골이나 같은 곳이다. 우리가 뛰어다니기 좋은 논두렁과 개구기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던 못이 있고, 병정놀이를 위한 조그마한 야산은 그야말로 우리들의 천국이다.
비오는 날이면 진흙발로 온 동네를 쏘다니면서 하루종일 미꾸라지를 잡으러 돌아다니고.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는 가을이 되면 잘 익은 벼이삭 사이로 날아다니는 메뚜기를 잡으러 다닌다. 잡은 메뚜기를 한 줄씩 엮어서 허리에 차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야말로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는 장군과도 같은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가장 추억에 남는 것은 초가을 달이 환하게 떠있는 저녁이면 동네언덕에 있는 콩밭을 헤매면서 콩서리를 하는 것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으레히 동네친구들과 병정놀이를 하고, 해가 지고나면 콩서리를 하러 찾아간다. 깜깜한 밤에 언덕위에 있는 콩밭으로 살금살금 다가간다. 그 밭의 주인은 동네에서 가장 힘이 세고 무서운 아저씨였다.
하지만 무서운 아저씨보다는 밭에 탐스럽게 열려있는 콩들이 더 우리를 유혹했다. 저마다 땅에 엎드려 열심히 콩을 따고 있는데 그때 『이놈들』하는 주인아저씨의 호령소리가 들렸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걸음아 날 살려라」하는 식으로 도망쳐버렸다. 한참이나 도망을 친 후 우리는 다시 모여서 우리들의 놀이터인 바위틈에서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타오르는 불 위에 서리를 해온 콩을 올려놓고 어서 빨리 익기만 기다렸다.
토닥토닥 소리를 내면서 다 익은 콩들은 튀기 시작하였고, 우리는 저마다 검게 탄 콩을 정신없이 주워 먹었다.
어둔 밤에 먹는 콩은 그야말로 꿀맛이며, 우리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을 맛이다. 이렇게 가을저녁 밤에 콩으로 배가 부른 뒤에 우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을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우리는 정신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내 얼굴이 너무나도 이상해져 있었다. 온 얼굴이 검은색으로 변해있었다. 어제저녁 모닥불에 콩을 구워 먹은 뒤의 그 검정이 온 얼굴에 칠해져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씩씩하게 돌아온 것이었다.
지금도 시골논두렁에 심어진 콩을 볼 때면 국민학교 시절 여름방학의 콩서리 맛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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