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보기에 따라서는 고독하고 가련하다. 우리는 도처에서 피곤하고 우울한 슬픈 얼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고통의 극복이며, 인생은 고통을 극복할 수 없는 한 슬플 것이다. 안락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지만 불행과 고통이 수시로 닥쳐온다. 그것은 우리 삶의 일부임에 틀림없으며 삶의 일부임에 틀림없으며 이러한 고뇌에서 해탈하려고 고행을 하기도 하였고 소설이나 시나 희곡을 통하여 인생의 고통과 슬픔의 사연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아프게 섧게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쓸쓸하게 한줌의 흙으로 돌아감을 체념하고「花無十日紅이이요…」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고 하였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먼저 불가항력의 자연의 횡포를 들 수 있다. 가령 아프리카의 가뭄과 굶주림을 화면에서 볼 때에 인생의 비참함을 실감한다. 인간의 일부는 홍수폭풍, 화재, 질병 등을 통하여 어제도 죽었고 내일도 죽을 것이다. 가까이로는 우리의 주변에서도 탄광이 무너지기도 하고 어선이 파도에 휘말려 가라앉기도 하고 자동차가 뒤집히기도 하고 불치의 병고에 시달리기도 함을 자주 본다. 그러나 인생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는 것은 그것보다는 인간 스스로의 미련함에서 저지른 악행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사회에 죄악은 옛날부터 존재하였다. 역사를 통하여 부상한 나라의 지배자들 중에는 비정과 횡포의 상징으로서 도덕적 타락자들이 많았다. 지구의 이곳저곳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은 인간 스스로의 작품이었다. 사실 인간만큼 잔인하고 야만적인 동물이 있는가. 같은 종끼리 억압하고 학대하고 죽이고 하는 것은 인간의 세계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불행은 사랑의 결핍과 인간의 미련함에 그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하겠다.
그런데 우리 일반 서민들에게는 온 역사를 들먹거리면서 또는 지구의 구석구석을 들먹거리면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논할 여유가 없다. 나 자신의 또는 나의 이웃의 현실이 더 다급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걱정도 슬픔도 없는 행복한 인생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 주변에는 돈이 없어서, 집이 없어서, 아들이 없어서, 명예가 없어서, 가정의 화목이 없어서 고통을 격고 있는 인생이 무수히 많다, 어떤이는 일찌기 아내를 또는 남편을 또는 자녀를 잃었고 어떤이는 가정불화로 파경을 하였고 어떤이는 불우한 환경에 태어나 배우지 못하고 인생의 밑바닥에서 발버둥치면서 한평생 눈물과 한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사실 슬픈 인생을 열거하면 끝이 없다.「꽃동네」의 불구자와 환자들, 「밀알회」의 결핵 환자들, SOS마을의 부모 없는 어린이들, 「릴리회」의 나환자들 등이 얼마나 불쌍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뿐인가. 모순된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하여 항거하다가 비참하게 분신 사망한 청년 근로자, 고문을 통하여 생명보다 더 아끼는 정조를 짓밟힌 여자 대학생, 물고문인지 전기고문인지 당하다가 생명을 빼앗긴 남자대학생 등등, 생각할수록 인생이 비통하기 짝이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날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애절하게 기도를 바친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인간이 우주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의 일부로서 창조되었다면 우리의 인생도 신비롭고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꽃 한송이 풀잎 하나에도 신비와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듯이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의 영혼에도 그것이 깨끗하고 순박할 때에 무한한 아름다움과 신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하고 포근한 정이 오고 갈 때에, 이웃에게 사랑과 희생을 베푸는 맑은 미소를 볼 때에, 어떠한 부귀영화를 주어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숭고한 지조를 볼 때에 우리는 영혼의 평화와 희열을 느낄 수 있으며 인생이 아름답기만 하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의 인생은 살기에 따라서는 즐거울 수도 있고 감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고통과 슬픔에 못 이겨 몸부림치다가도 주변에 더 불쌍한 이웃이 있음을 보고는 자신이 받은 은혜가 죄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난함을 슬퍼하기 전에 훨씬 더 가난한 인생이 있음을, 귀하신 몸이 되지못함을 슬퍼하기 전에 훨씬 더 미천한 인생이 있음을, 건강하지 못함을 슬퍼하기 전에 훨씬 더 고통스러운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인생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스스로의 처지가 감사할 것이다. 가령 집 없이 길가에서 쓰러져있는 불구자를 볼 때에, 눈 먼 장님이 길을 더듬거리는 것을 볼 때에, 손가락 발가락이 썩어 문드러진 나환자들을 볼 때에, 부모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정에 굶주린 고아들을 볼 때에 세상의 이곳 저곳에 얼마나 나보다 불쌍한 인생이 많은가. 나에게는 그러한 고통과 불행이 닥쳐와서는 아니된다는 무슨 특권이 있는가.
불우한 이웃은 우리 인간의 일부이며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나도 마땅히 받아야할 고통의 일부라고 생각할 때에 그들에게 빚진 생각과 감사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인생은 고통스럽지만 아픔과 사랑과 인정을 서로 나눌 때에 그것은 즐거움과 아름다움과 감사의 삶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왜 죄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철학적인 해답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죄악을 모조리 없애지 않는데 대하여 하느님과 담판할 입장에 있지도 않다. 아마 하느님과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 인간이 그 자유를 악용한 것이지 하느님이 죄의 함정을 파놓고 인간이 빠져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뭏든 인생은 죄악과 싸우고 고통과 싸우다가 외롭게 죽어간다. 성직자 묘지의 입구에 라틴어로「HODIE MIHI,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그대에게)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오늘 아니면 내일, 하나 하나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고 자연의 질서이며 하느님의 법이요 섭리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구제도 하느님의 법과 섭리에 따름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이 세상의 고통중의 고통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대신 속죄의 제물로서 바쳐진 고통으로서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열어주셨다. 그 고통이 얼마나 쓰라린 것이기에 『아버지,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하셨을까. 그러나「아버지의 뜻대로」순명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다. 영광의 부활도 십자가의 고통이 전제되듯이 우리의 영혼은 고통을 통하여 훈련되고 정화될 수 있음을 생각할 때에 그 고통의 존재가 오히려 신비롭기만 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축복 받는 인생에는「슬퍼하신 자」가 포함되어 있다. 고통과 슬픔을 영혼의 단련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자유와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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