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갖고 다니는 천원권 지폐 뒷면에서는 두어평 될까 말까한 자그마한 「도산서당」건물 그림이 실려 있다. 하도 작다보니, 퇴계선생의 키가 작았다느니, 검소하셨다느니 하는 화제 거리를 제공해준다. 이렇게 자그마한 집에서 그렇게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니 신기할 정도이다. 벽과 벽으로 가려지고, 구획되어진 땅의 공간만 자기소유로 여기는 요즈음 우리 안목으론 너무나 작고 궁색하다.
퇴계선생도 그렇게 느꼈을까? 불편하고 답답하지만 검소하셔서 참고 살았을까? 그것이 아닐 런지도 모른다. 앞에 내다보이는 들판과 강물조차 내 소유로 느꼈고, 등지고 있는 뒷산 꼭대기까지 내 삶의 영역이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멍석 깔고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에 내려와 안기는 별무리를 내 것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누구의 소유인가 누구의 재산인가 따지는 계산은 별의미가 없게 된다. 퇴계는 이런 자연관과 세계관을 가졌기에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살았고, 이 작은 온돌방에서 「이(理)와 기(氣)」를 묵상하면서 경천애인(敬天愛人)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게다.
전통가옥을 조사해본 어느 학자가 천장 높이에 대해 쓴 글을 읽어 보니까 앉은 사람의 머리위에서 그 사람의 선키 정도의 높이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야 사람의 기(氣)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고 주장한다. 낮으면 기(氣)가 막히고 눌린다고 한다. 그렇다고 너무 높으면 기(氣)가 힘이 없어서 꺾이거나 기죽는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사는 집 주님의 집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너무 낮거나 너무 높은 것은 아닐는지.
동양적 사유(思惟)와 자연환경 그리고 독특한 전통을 지닌 우리가 열효율이나 따지고 기능 같은 것만 관심 가져서야 되겠는가. 뾰족한 종탑에 높기만 한 천정이 이색적이고 경건하기만 하다는 사고가 성당의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것은 아닌가?
성당에 들어가면 괜히 기가죽고 찔끔해져서 구석에 고개 떨구고 앉았다가 성당 문만 나서면 마치 자유나 얻은 듯 홀가분해지는 이런 기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생각해볼 일이나. 그래서 성당 안에서는 기가 팍 죽은 사람들이 밖에 나와서는 기가 성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이 되지 않는 위선자 예수쟁이(?)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늘높이 바벨탑을 쌓아 하느님께 도전하던 그 후예들이 오늘도 그저 성전은 높은 것인 줄로만 알고 자꾸만 높이 쌓아올리려고 한다. 그 안에 사는 정말로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의 기(氣)가 이것 때문에 죽는게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볼 일일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성당도 그렇고, 우리의 살 집도 예사롭게 지을 일은 아닌 것 같다. 기(氣)를 살리는 집을 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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