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도 모르는 어지럼증과 탈진에 시달리느라 봄내내 성가대에 앉지를 못했다. 다만 성가대석으로 오르는 계단을 마치 천상으로 이어지는 야곱의 사다리인양 아득히 바라다만 볼뿐이었다.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젊은 형제 요한씨는 그리 썩 훌륭한 노래솜씨를 지니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어느 모임에서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부르던 노래를 들었을 때 나의 영혼은 번쩍 정신이 났다. 이종철 신부님의 현양 칸타타와 내가 만나는 첫 순간이었다.
나는 그 이튿날부터 누구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순교자의 넋에 이끌려 이 몇 달을 지내왔다. 뿌리서부터 유교적 습속에 젖어있던 이백년 전의 우리 선조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켜낸 믿음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기적의 힘인지…
현기증과 무력감은 여전했으나 그것으로 해서 내가 죽기까지야 하겠는가 싶어 나는 최선을 다했다.
연습시간은 나에게는 그대로 봉헌의 연속이었다. 두 다리로 걸어 당신 집에 오게 해주시고, 눈을 주어보게 해주시고, 음성을 주어 찬미하게 해주시고, 지혜를 주어 생각하게 해주시고, 마음을 주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해주시고… .
해가 저물면 서둘러 저녁을 지어놓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식구마다에게 몫몫의 메모를 남기던 작은 그리움도 있다. 『찌게는 센 불에 데우고, 생선 졸임은 약한 불에 올려야 됩니다. 나물과 김치는 냉장고에 있구요…』『…시험 잘 봤니ㆍ 공부하다 졸리면 수박꺼내 먹어, 엄마가 없는 동안은 천상의 어머니께서 너를 돌보실꺼야…』
온종일 일과 사람에 시달리다가 저녁도 굶은 채 뛰어오는 남자단원들을 볼 때는 잔잔한 감동이 일기도 했다.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러하게 만드는가? 어두운 제대 뒤의 감실 앞에서 흔들리는 등불을 보며 거듭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무대에서의 발표. 그것은 이미 뒷전이었다. 우리는 들려주고 보여주기 위한성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내안에 받아들이고 나를 봉헌하기 위한 찬미를 드렸던 것이다.
나 스스로가 감동되지 않고 어찌 다른 이가 그리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모두가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닌 우리들이 부르는 노래가 완벽할 수 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와 격려로 이끌어 주신 이 신부님. 한국적 감성으로 곡을 지으시고 대본을 엮으신 신부님을 나는 이 시대의 우리에게 내리시는 하늘의 은총이라 여겼다. 부디 건강하시고 주님의 손길이 신부님과 함께 머물러 천상의 숨겨진 노래를 지상으로 끌어오는 신묘한 의무의 종이 되시기를 빌어본다.
성황 속에 발표회가 끝나고 막이 내렸을 때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대를 내려왔다. 한순간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여기저기 얼룩진 젖은 무늬가 무엇인지 몰라 나는 의아로웠다. 잠시 뒤 그것이 더위와 감동으로 흘린 성가 대원들의 땀과 눈물의 흔적임을 알았을 때 나는 어느새 고여 오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두 팔을 들어 흔들리는 내 가슴을 끌어안고 말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