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얼굴도 까맣게 그을린 군대 생활도 거슬러 올라 간다.
농촌이지만 외동아들로 태어나 귀여움만 받고 지내다가 딱딱하고 숨 막히는 군대생활이란! 불평이 있어도 말 한마디 옳게 못해보고 지내야만 하니 갑갑하고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등병의생활이란 바쁘고 고달프고 실컷 잘했다 싶어도 잔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나마 매타작밖에 없었다. 고참들의 눈빛만 보아도 마음이 덜컹내려 앉는 것만 같았다. 이런 생활 속에서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정말 힘드는 일이었다.
내가 군에 입대한 어느 날 훈련소에서 내무반장이 종교를 가진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군 입대 전에는 종교를 가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천주교 신자」할 때 손을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나의 생활기록부에는 천주교 신자라고 기록되었다. 사실은 교회를 다니진 않았지만 딱딱한 군생활의 분위기보다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손을 들게 되었고 나도 모르는 어떤 계시가 그 순간 나의 마음을 움직여 주었을 것으로 믿고 싶다.
이렇게 생활기록부에 천주교신자가 되었으니, 자대 생활을 하면서도 천주교회에 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요일이 되면 부지런히 단정한 차림으로 성당에 가곤하였다. 내 마음 속은 비양심적이면서도 열심한 교우인 것처럼 주일이면 모든 일을 접어두고 성당에 나가곤 하였다.
열심히 성당에 나가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다니는 성당은 군부대의 울타리 밖이었기 때문에 일요일만이라도 군부대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은 심정에서 성당에 나간다고 핑계 삼아 울타리 밖에서 하루를 즐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루를 군대부를 이탈하여 성당에 나왔지만 반겨주는 이는 한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성당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나갔었다.
몇 개월이 지나면서 내가 다니는 성당이 공소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공소회장님이 공병대중사였었는데 나를 무척 관심있게 대해 주었으며, 일요일 미사 후에는 막걸리는 목을 축일수도 있었다.
어느날 술좌석에서 회장님은 말을 건내시며, 『이 일병 본명이 뭐지?』라고물으셨다. 나는 내 이름이 이충근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그게 아니라 성당에서 부른 이름이 있다고 하시며 자기는 요셉이라고 하였다. 그는 내가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는지『그럼 영세도 받지 않았겠구먼』하시면서 더욱 자리를 가까이 다가앉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그러면 이 일병, 교리를 배워서 영세를 받아야지』하시면서 오랜 시간동안 자세히 영세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자상한 말씀 중에 특히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미사시간에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흰떡을 받아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고, 이 흰떡도 세례 받은 후에 받아 모셔야 된다고 하셨다.
정말 창피한 이야기였다. 모르면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갈텐데 뭐 잘한다고 남들이 나가니까 덩달아 따라가서 못 먹을 것을 먹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혼자 생각에 남들이 헌금하면 나도 봉헌하였고 남들이 받아먹으니까 나도 받아먹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리의「교」자도 받아보지 않았으니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서투른 행동이 회장님 눈에 드러났는지 공소 회장님은 눈치를 채시고 작은 책 한권을 주시면서 이 책을 시간 나는 대로 읽어보라고 하셨다. 그 책은 천주교 교리 책자셨다. 너무 좋은 책이었지만 군 내무반에서 나는 졸병이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책을 읽어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교리서는 받았지만 한번도 읽어보지를 못했다. 사실은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이고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1973년 12월 24일 성탄 전야 미사 때 나는 영세를 했다. 대부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지금도 누군지는 확실히 모른다. 나의 본명은 요셉이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한번도 주일날 빠지지 않고 나오는 성의를 생각해서 아마 공소회장님이 추천하셨는 것 같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받은 영세였지만 마음은 기뻤었다. 앞뒤에서 축하의 노래를 불러주고 모두 친형제자매인 것 같이 느꼈다.
그런데 기쁨에 나는 내무반과 우리과원들을 많이 데리고 나가게 되었다. 내가 상병으로 진급하고 난후 약 열명의 우리내무반 동료들이 같이 나가게 되었고, 병장이 되면서 내무반장을 맡게 되어 그때부터는 주일이 되면 외출과 근무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당에 데리고 나갔었다. 공소회장님은 무척 기뻐하셨다. 회장님께서는 나에게 견진성사를 받으라고 권유하셨다.
나는 견진성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회장님이 권유하시니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더니 간단한 찰고지 한 장을 주시면서 답을 외우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1975년 8월 15일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날 나는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마 그 당시 견진성사를 집전하신 주교님은 지금도 광주대교구 주교님으로 기억한다. 성당은 상무대 성당이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군대생활 속에서 미천한 나를 계속 기쁨 속으로 부르셨지만 군대에서는 열심한 척한 것이지 결코 열심한 신자가 되지못한 것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군의 의무를 마치고 사회생활로 돌아왔을 때 과연 나는 매주일을 지켰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였다. 지금도 새로 나온 예비자들이 말하듯이, 우리 성당 교우들은 처음 나오는 사람에게 냉냉하고 인사도 할 줄 모른다고 하는 말이 정말 맞다고 생각한다.
그때만 해도 이제 내가 다녀야 할 성당 교우들이 왜 따뜻함이 없어 보이는지 남의 집에 온 것같이 서먹서먹하고 얼굴이 부끄러운 것 같아서 어쩌다 한번 놀이삼아 놀러가는 성당이 되었다.
처음 제대를 하고 돌아왔을 때는 아기 엄마와 아이들과 같이 고운 옷을 갈아입고 몇 번 나가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러면 우리 가정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2대독자로 태어났기에 완고하신 아버님께서는『네가 일찍 결혼을 해야 후손을 일찍 본다』고 하시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결혼을 강요하셨다. 사실은 내가 대학에 진학을 하지 못하고 방황할까 염려하셔서 일찍 결혼이야기가 오고간 것 같았다.
나는 한 해 재수를 하여보았으나 대학에 갈 성적이 되지 않아서 그해 8월 16일 결혼을 하였다. 그때 나이 21세였으며 처녀 쪽은 19세였다. 참 철부지 없는 결혼이었다. 22살 때 우리 사이에는 맏딸 은미가 태어났고, 두 번째 아이는 아들 진우였다. 이 아이는 군 생활을 하던 중에 얻었다.
이렇게 단란한 가정이 되었고 아내는 내가 제대를 하고 집에 같이 있게 되니 임신이 찾아 낙태수술도 자주 받게 되었다. 수술을 받을 때마다 고통을 참는 아내가 안쓰러워 나는 아무도 모르게 정관수술을 하였다.
그때 당시 정부에서는 둘만 낳아 알뜰하게 잘 키우자는 캠페인이 붐을 이룰 때였다. 나도 그 캠페인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그 당시는 당연한 줄만 알았으며 군에서 제대를 하고나니 이제 아이들과 먹고 살아야 된다는 생존경쟁이 머리에 꽉 메워져 내 마음은 한 치의 여유도 없었다.
또 농촌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면 남에게 뒤떨어질까봐 그것이 싫어서 가까운 도시 대구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집식구들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도망하여 고등학교 졸업 후 잠시 배웠던 운전이 하고 싶어 대구시 J회사에 입사하여 택시 기사가 되었다.
입사 후 몇 개월 동안 열심히 일을 하여 월세방이지만 방도 한 칸 얻어놓고 집사람과 아이들을 대구로 불러왔었다. 궁핍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죽지 못하여 산다고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보람스러웠다. 가난은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한 생활에서 쫓아낼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허리띠를 조이고 집사람도 이 시장 저 시장 다니면서 맞벌이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약 5년 만에 약간의 도움은 받았지만 열세평짜리 작은 아파트도 한 채 구입하였다.
아파트를 사서 세를 놓고 우리는 또 전세방을 얻었다. 좀 더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때 벌써 맏딸 은미는 삼덕국민학교 3학년이 되었다. 예쁘고 공부도 학기말이면 학력 상을 타오곤 하였다. 정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남들이 우리가정을 부러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군에서 영세를 하고 견진성사까지 받았지만 지금은 무엇인가? 교적은 시골 본당에서 대구의 집으로 붙여왔지만 책꽂이에 꽂아놓고 대구에서는 한번도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 영세지만 일요일 날 회사에 나가 배차를 받아 일을 하다보면 손님 중에 어느 성당에 가자고 하면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느꼈다. 나는 그때마다 성당에 가볼까 하다가, 그냥 생각만으로 망설인 적이 한번 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도 그 당시뿐이지 딴 손님을 모셔주고 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남부럽지 않게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할려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서슴지 않고 뛰어 들어가 불이 나게 돈벌이에 열중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틀 일을 하고 나면 하루를 쉬고 또 이틀일하면 하루쉬면서 쉬는 날은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지만 나의생활은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매일 같은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런 가운데 차츰 살림도 조금씩 불어나 식구들 생활이 넉넉하지는 못하여도 약간의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또 시골아버님도 상업을 하시기 때문에 별로 쪼들리는 살림은 아니었다.
사실 아이들 교육문제도 아버님과 상의하였으면 문제가 되지도 않았지만 좁은 소견에 구차하게 아버님께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다고 잘못한 생각이 결국 부모님을 두고 우리끼리 도시로 나간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또 부모님께서도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여기에도 용기를 얻어 고생의 길로 뛰어든 셈이었다.
1987년 가을, 나는 차를 배차 받아 그날 일을 시작하였다. 그해따라 하루에 한번씩 빗방울이 떨어졌었다.
비오는 날 영업용택시를 운전하는 것은 무척 신경을 써야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운전기사들이 모두 일하기를 꺼려한다. 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날도 나는 계속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배차를 받아 일을 하던 중 장거리 손님을 모시고 안동에 갔었다. 손님을 모셔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또 손님 네 분을 모셨다. 빗길을 조심하여 달렸지만 아차! 하는 순간 교통사고가 나고 말았다. 나도 정신을 잃어버렸고 차에 탄 네 분도 모두정신을 잃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3일이 지난 후였다. 집안 식구들은 내가 깨어나니 모두가 울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손님 4명중 1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중상이라고 하였다.
앞이 캄캄하고 아찔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아- 나는 끝났구나!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며칠 뒤에 검찰에서 조서를 받으러 왔었다. 그때 경위는 이러하다. 하루의 일몰직후라 매일같이 내리는 비 때문에 라이트를 켜도 아스팔트가 흡수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몰고 있는 차량은 속력이 약60㎞정도의 속도였다. 짐작컨대 약3m앞에 경운기를 개조한 추레라가 보였다. 우편은 낭떠러지기고 왼쪽은 중앙선이었는데 중앙선을 침범하는 순간 마주 오는 2ㆍ5t 트럭을 박고 말았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으니 전적으로 나의 운전 잘못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왜 상대방차와 충돌했는지 모르겠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내 자신은 빠르게 추월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면 경운기의 추레라 뒤쪽을 박아도 이렇게 많이 다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그러나 검찰은 공정한 법대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나의 잘못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순간적인 잘못으로 아까운 한 생명을 잃게 되었고 남은 것은 잘못한 벌을 받을 일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검찰에서 묻는 말에 숨김없이 자세히 잘못을 시인하였다.
또 나 때문에 죄 없는 트럭기사가 보호실에 있다고 하였다. 정말 내가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완쾌되면 교도소로 가야됨이 마땅하다고 여기면서도 마음만은 자꾸 무거워졌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위기를 면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꽉 메웠다. 머리가 무거워짐에 따라 나는 술로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아픈 다리를 끌고 몇 번 재판을 받으러 갔지만 몸이 성하지 못하니 다음에 다시 소환장을 보내겠다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하였다. 돌아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날을 기다렸다.
그때 친구들이 찾아와 좋은 길이 있는데 가르쳐 줄 테니 그렇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물어볼 것도 없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그 친구는 변호사를 사고 약간의 돈을 써야 된다고 하였다. 물론 그 정도도 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느냐고 아무튼 되도록 해 보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7회에 걸쳐 받아온 재판은 끝이 났었다.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일단 복역은 하지 않아 되었다. 그러나 이 불상사 때문에 나는 술을 더 많이 먹게 되었고 괴로울 때는 괴롭다고 한잔, 일이 좀 잘 되어 가면 기뻐서 한잔, 이런 생활이 계속 누적이 되다보니 이제 그 재판의 과정은 끝이 났다고 해도 나는 썩어버린 페인, 인간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병원에서 집에 퇴원해 와서는,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하고 나가면 술에 만취되어 하루 이틀외박이 잦아지고 술을 먹다보니 아무 여자와도 놀아나게 되고 완전한 주정뱅이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매일 연장이 되어 집식구 생각은 하지도 않게 되었다. 더구나 애기 엄마는 나보다 더 괴로워하면서 매일 나를 달래었으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나의 잠시 잘못으로 대구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미겠다고 사두었던 아파트도 하루아침에 날려 버렸다. 남편은 허구한 날 술로 보내니… 아니, 술만 마시면 괜찮지, 외박에다 바람을 피우니 더욱 괴로워하면서 내가 밤늦게 돌아오거나 외박을 하고 아침에 들어오면 아내는 화가 나서 아이들과 죽어 없어지겠다고 입버릇처럼 자주 말했다. 그러나 너 혼자 하는 말, 하는 식으로 내팽개쳐버리고 나는 날마다 술에 의존하였다. 집에는 매일 말다툼이 생기고 잠잠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아버님께서도 꼴 보기 싫으니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술이 깨면『얘야 너 왜 그러느냐? 교도소갈 것을 아버님이 힘써서 가지 않게 되었으면 아버님께 고맙다고 하면서 아버지 일하시는데 열심히 거들어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매일 밤을 새우고 술에 만취가 되어 있어서 되겠느냐』면서 타일러 주시곤 하였다. 그래도 나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님의 모아둔 돈을 훔쳐서 술값으로 쓰고 한 푼 벌이도 하지 못하면서 고급담배에 계집질까지 하니 날이 갈수록 큰 수렁에 빠져 헤어날 줄 몰랐었다. 때로는 술집 아가씨를 집까지 데리고 와서 잠을 자곤 하였더니 아이엄마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든지 아이들 둘을 데리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나는 어디 가서 며칠 있다가 오겠지라고 생각하였는데 통 연락이 없어서 처갓집에 가보았더니 거기도 오지 않았다고 하였고 집에도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아이들 둘과 약을 먹고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그제서야 아찔한 생각이 들면서 내가 왜 이런 일을 또 저지르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몽롱해져 버렸다.
× × ×
그때 심정은 표현할 수가 없다. 앞이 보이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어지럽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찾아와 못난 나를 위로하면서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리라고 타일러주었다. 그리고 친구 몇 명과 아버님이 현장으로 가셨다. 나를 가지도 못하게 하신 아버님은 그 이튿날 현장에 갔다가 돌아오셨는데 아이들 둘은 산에다 묻고 애기엄마는 아직 생명이 붙어있어서 병원에 입원시켜 놓았다고 하시면서 내일 병원에 가보거라』하시고는 방에 들어가시어 누우셨다.
나는 그날 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ㆍ
그렇게도 귀엽던 아이들. 시험 치면 아빠 백점 맞았다 하던 맏딸 은미, 아들 진우 녀석. 태권도 도장에서 도복입고 뽐내던 일들.
대구에서 쉬는 날이면 손잡고 공원에서 뛰어놀던 일들이 나의 뇌리를 뛰어놀던 일들이 나의 뇌리를 떠나지를 않았다.
이놈들 둘 잘 키우겠다고 정관수술을 해버렸으니 또 그이야기를 아버님께 말씀드려야 되니 걱정이 끝이 없어 고스란히 뜬눈으로 밤을 세웠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조금도 없었다.
아침 일찍 차를 타고 아이엄마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집에서는 나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괘씸하기 짝이 없었는데 만나고보니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끌어안고 울었다.
『왜 이렇게 해야만 했느냐?』하면서 울고 있는 집사람에게 물었더니, 말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그리고는 한참 후 나와 아이들 없더라도 술취 하지 말고 좋은 사람 얻어서 잘살아야 된다고 하면서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아이엄마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선생님께 자세히 물었다. 치료가 될 수 있느냐고? 의사선생님은 가망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시면서 혹시 모르지만 큰 병원으로 옮겨보라고 하였다. 가망이 영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아이엄마와 상의하였다. 큰 병원에 가서 죽으나 똑같고 아이들이 둘 다 죽었는데 내가 살아 무엇하겠느냐면서 그냥 버려두고 당신도 가라고 하였다.
끝까지 자기는 죽겠다고 하면서 병원에서 주사도 맞지 않고 거부하였다.
의사 선생님에게도 나를 살릴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게 아기엄마가 발버둥 치니 의사선생님께서 몇 번 큰 소리로 꾸중을 하셨다. 얼마동안 꾸중을 듣고난 후 응급치료를 받고서 대구D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가망은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나는 수술을 해 보자고 했더니 외과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 사람은 식도를 갈아야 되고 위장도 끊어내야 되는데 이렇게 큰 수술을 하고나면 90%는 죽는다고 하였다. 그래도 10%의 가망이 있으니 해보자고 졸랐다. 수술은 약 9시간 정도 걸렸다. 수술은 최고로 잘되었지만 너무 오래 걸려서 깨어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몇 시간 후 아이 엄마는 깨어났고 수술은 성공하였다. 몇 개월 동안 입원하여 옆구리로 죽을 넣어야 했고 그 후 퇴원해 집에 와서도 식도를 묶은 실을 입 밖으로 나오도록 해서 입으로 물고 있어야 했으며 죽은 약 1년 동안 옆구리로 주사기를 이용하여 집어넣어야 되었다.
집사람은『왜 나를 살려서 이렇게 고생하게 하느냐』고 했었다. 그리고 계속 치료를 받고 누워있어야 되니 집안 식구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금방 시집온 색시도 아니요 잘한 것 하나도 없는 아기 엄마에게 선후야 어떻게 되었든 시집와서 자기가 낳았지만 아이들 둘을 없앤 장본인 아닌가! 그래서 식구들은 누구 하나 좋아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몇 개월이 지나고나니 불쌍해서인지 동정심에서인지 여동생들이 언니가 무엇을 하면 언니 좀 쉬어라 하면서 위로하였고, 어머님은『얘야 가만히 좀 누워서 있거라』하시며 감싸주기까지 하셨다.
병원에서 아이 엄마를 퇴원시킨 며칠 뒤 나는 아버님께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6년 전에 아이를 못 낳게 내가 정관 수술을 받았다고 말씀드렸드니, 아버님께서는『이놈아, 외동아들에 딸 하나 아들 하나 낳았다고 정관수술을 해!』하시면서 아버님께서는 큰 한숨을 휴-하고 내쉬시었다. 그 이튿날 돈을 마련해 주시면서 서울에 올라가 수술을 받아 보라고 하셨다.
나는 큰 병원마다 찾아다니며 6년이 지났는데 가망이 어느 정도 있느냐고 물었다. 병원마다 복강수술을 하면 약30%의 확률밖에 없다고 하였다. 나는 그래도 큰 병원인 서울대학병원에 갔다. 거기도 확률은 30%라고 하였다. 30%의 가망이라도 좋은 수술을 받고 수술이 잘 되었는지 보기 위해 약 6개월 후에 오라고 하였다. 시골에서 다시 서울에 올라가기란 무척 힘든 일이였다. 또 수술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 재수술은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서울의 병원엔 다시 가지 않기로 하였다.
집에서 아버님 상업을 도와주면서 지체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 엄마가 대구 D병원에서 퇴원하여 집에 온 후 군에서 내가 제대를 하고 돌아 왔을 때 몇 번 같이 나가본 성당이 그리웠는지, 의지할 곳이 없어서였는지 매일 밤 성당에 나가곤 하였다. 알고 보니 우리 가족들은 아무도 몰게 교리를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약 1년 뒤 세례를 받았다.
영세를 한 후 아이 엄마는 어느 날 밤 이렇게 말을 건네 왔다.『여보, 신부님께서 당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합니다. 언제 시간이 나는 대로 신부님께 한번 올라가 보세요. 참 좋으신 분 같아요』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찡하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죄스러운 심정이 나의 온몸을 감싸고 있음을 느꼈다.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 모두 나에게 술주정꾼에 자기 자식까지 없앤 놈이라고 이제는 말도 잘하지 않았다. 나는 친구도 없고 어떤 일을 하여도 협조해 주는 이가 한사람도 없었으며 완전히 소외받고 고립된 존재였다. 그러한 처지에서, 그제서야 주님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도 곧장 신부님을 찾아가 뵙기는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며칠간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신부님을 만나러 올라갔다.
신부님은 만났을 때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좋으신 신부님의 말씀을 한참 듣고 난 후 신부님의 이끄심에 따라 소성당에 들어갔었다. 신부님은 감실을 가리키시면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나는 감실 앞에서 잘못을 뉘우치며 한없이 울었다.
신부님께서 계속 함께하여 주셨고 나를 달래시면서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그분의 끝없는 따뜻함에 더욱 송구스러울 뿐이었다.
또 신부님께서는 나의 본명을 부르시면서『요셉씨,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 죄짓지 않고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라도 빨리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또한『요셉씨 이 돌을 보세요. 이 둥근 돌이 처음부터 이렇게 생겼을까요? 큰 바위에서 떨어져 나올 때 모가 뾰족뾰족 났었을 것이며 날카로운 칼날처럼 생긴 부분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산에서 밑으로 내려오면서 부딪치고 깎이고 멍이 들고 또 물에 씻기고 하다 보니 이렇게 둥굴어졌을거예요? 아마 우리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육신이 부딪치고 정신이 여기저기 시달리고 해서 아픔을 이겨낼 때 완성된 한인간이 된답니다』라고 하시면서 돈 버는 세속의 명예를 멀리하고 이제 주님을 위하여 일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신부님, 제가 무엇을 알아야 협조를 하지요』라고 하였더니, 신부님께서는『기도하세요. 이 세상 모든 일을 주님께서 주관하시니,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열심히 주님께 의탁하세요. 기도만이 요셉씨 자신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타일러주셨다.
나는 신부님의 자상한 보살핌에 다시 용기를 얻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부터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열심히 성당에 올라갔고 어려움이 부딪치면 신부님과 상의를 하였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내가 열심히 성당에 다니니까, 교우들이 충근이가 성당에 나오면 성당 다 버린다고 원성이 대단하였다. 신부님께 항의도 들어왔고, 충근이가 성당에 나오면 우리는 성당에 다니지 않겠다는 몇 몇 분의 교우도 있었다.
참 나의 입장은 난처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이 떠들수록 신부님께서는 저의 집에도 찾아오셨고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잘 참는 자가 되어야 된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신부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왜관수도원으로 칠곡 피부과 병원이나 나환자촌으로 또는 병자방문 때나 초상집 연도하는 곳으로 다니시면서 나의 좁은 시야를 넓혀주셨다.
나는 너무너무 기뻤다. 이렇게 좋으신 주님을 왜 영세 때부터 열심히 따르지 못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렇게 기쁘게 생활을 하다 보니 성당의 여러 가지 일을 맡아하게 되었다. 시골 성당이라 성모님을 모시지 못하였는데 교우들이 협조하여 직접 교우들이 성모상을 돌로 제작하여 모시기도 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니 교우들과 가까워졌다. 주님께서는 사목회 활동부장으로 교우들 앞에 나를 세워주셨다. 나는 새로운 각오로 우리 교우들이 좋다고 하면 어떤 어려움도 기쁜 마음으로 해나갔다.
이렇게 기쁜 생활을 할 때 주님께서는 더 큰 축복을 주셨다. 우리부부에게 또 다시 예쁜 공주를 주셨던 것이다. 이날은 잘 잊혀 지지도 않는다.
1982년 3월 11일. 나는 너무 기뻐서 그 기쁨을 주님과의 대화로 돌렸다.
『주님! 오늘 태어나는 아이가 아들이면 사제로, 딸이면 수녀로 바치겠습니다』라고.
사실 우리부부는 애기를 가지면서부터 임신 중에도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첫째 아들과 첫째 딸은 주님께 바치자고 자주 말하였고 그렇게 되기를 기도드렸었다. 첫째 딸을 얻어 신부님께 이름을 지어 주십사 청을 하였더니 마리아로 지어주셨다. 우리 부부는 마리아를 세속 이름 없이 호적에 마리아로 등록하였다.
두 번째 아이는 약속대로 아들이었다. 신부님께서는 둘째 아이 장남의 이름을 이대건 안드레아로 지어주셨다. 세 번째 딸은 마셀라(세속이름 없음) 네번째 아들은 이윤일 요한이라 지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고 영광을 주셨다.
많은 죄 속에서, 그 캄캄한 어두움에서 광명으로, 나를 부르기 위하여 너무 애쓰신 주님께 송구스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죄인에게 나는 아들딸을 풍성하게 허락하심은 주님이 쓰시기 위함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면 자주 욥기가 귓가를 맴돌곤 한다.
『맨몸으로 태어나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인이 주셨던 것 주인이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 이름 찬양하리라』는 욥기의 말씀이 나의 작은 마음을 가득 채워주며 그 말씀은 항상 나를 지켜주시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 말씀은 나에게 용기를 더욱 북돋아준다.
냉담을 하다가 처음 성당에 갔을 때 그렇게도 못마땅해 하시던 교구들이었지만 주님은 교우들을 통하여 더 굳은 믿음을 가지라고 이분들과 화해와 사랑의 은총을 주셨다. 교우들은 나를 1987년과 1988년 두해 동안의 사목협의회 회장으로 선출해 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 부부가 주님 쪽으로 변하여지자 우리 가족 모두는 영세를 했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성당이라면 완강히 반대하시던 아버님도 야고보로 본명을 받았으며 어머니는 아가다, 동생들도 모두 영세를 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구하기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함께 하시었다는 것을 이제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족은 각 단체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말씀을 행실로써 빛내는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거듭 다짐한다.
주님, 우리 부부를 통하여 빛이 되게 하셨으니 당신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이제 남은 생애를 다해 세속에서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지른 저이기에 모든 죄를 회개하고 저 때문에 일찍 돌아가신 분들을 위하여 기도드리며 다시는 저와 같이 어두움에 빠지는 이가 없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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