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웃동네에 복동(福童)이란 사람이 있다. 나이는 거의 70세에 가깝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이 시키는대로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 뿐이다. 언제 어떤 연유로 그가 이 고장에 정착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직은 약간 후한 농촌인심 덕분에 그저 혼자 몸뚱이로 그날 그날 동네일을 거들어 주고 목숨을 연장시켜가고 있는 복동이다.
『얘 복동아! 너희 집이 어디게? 니네 아빤 누구게?』동네 꼬마들이 만나면 하는 인삿말이다.
그러나 그 동네에서 복동이란 존재는 대단한 인기다.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복동이가 나타나면 아예 포기를 해야만 한다. 다짜고짜 달려들어 기가 막힌 바보짓으로(자기 생각엔 심각하겠지만) 더 이상 끌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 또한 많다. 그런데 나에게는 친구가 그렇게 많지 않다. 몇해 전 친구들 모임이 있어 서울에 간적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시골사는 친구라하여 일류 술집으로 모셨다. (지금 생각하니 삼류정도였지만).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서 술따르는 기생은 연신 싱글벙글하면서 나만 쳐다보고 말을 해오는데, 그들은 마치 나를 시골 약장수들이 데리고 다니는 원숭이로 보는 것 같았다.
사장님 댁에 문안드리러 갔다가 쫓겨나는 기분으로 다시 시골집으로 향했다.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친구가 되는가보다 싶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언젠가 연수 교육을 받을 때의 일이다. 대상자는 전부가 농촌 사람들이고 가난에 찌든 얼굴들이었다. 강사로 오신 분은 비싼 승용차를 타고 와서 하는 말이 『우리는 한 형제요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불우한 형제들을 도와주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길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왜 그분의 말에 공감이 일기보다는 반감이 앞서는 것일까?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주입시키고 있어서일까?
지금은 예수 수난 주일이다. 조롱당하고 매 맞으며 가난한 모습으로 죽임을 당한 예수와 친구가 되어야 할 시기이다. 그래서 성(姓)도 모르는 가난한 복동이 노인처럼 많은 가난한 친구를 사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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