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8남매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가 있고 아래로는 여동생 넷과 남동생 둘이 있으니 딸로서는 장녀가 되는 셈이다.
부모님은 금슬이 좋으신 분들이다. 아버님은 교육자이셨으며 말씀이 없으시면서도 자상하시고, 인자하시면서도 근엄하신 분이셨다.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모국민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재임하고 계셨다. 어머님은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이셨기에 늘 가정에 함박웃음이 피어나게 하셨고 콧노래를 부르시면서 우리 8남매를 기르셨다. 또한 어머님은 알뜰살뜰한 살림솜씨로 식구들에게 집안일을 하나도 맡기지 않으시고, 혼자 도맡아 하시면서도 짜증을 내시는 일이 없으셨다.
열 식구가 살아도 싸움한번, 큰소리 한번 없이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하곤 했다. 마을 사람들이『이떻게 선생님 댁에는 아이들의 싸우는 소리가 없어요?』하고 묻는가하면 8남매가 언제 나갔다가 들어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점잖다고 하면서 칭찬해 주곤 했다.
어릴적 내가 살던 동네에 교회가 있었기에 나는 교회에 다니며 성탄 때는 주일학교에서 연극도 하고 노래도 하고 기도하는 흉내도 내곤했다.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점점 깊어졌다. 성서를 읽는 것도 재미있고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성경말씀을 들려주는 일이 여간 흥미롭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매일 새벽 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새벽녘, 우산을 받쳐 들고 어스름한 새벽거리를 나서노라면 우산 위를 톡톡 소리 내면서 떨어지는 빗방울소리가 마치 하느님의 소리처럼 들렸으며 흰눈이 내리는 겨울새벽, 파리한 가로등불 빛에 반사되어 더욱 하얘지고 흰 보를 깔아 놓은 듯이 깨끗한 눈 위를 제일 먼저 바삭바삭 걷노라면 예수님의 발자국소리가 들릴 듯하여 귀를 기울이며 새벽기도를 다녔다. 교회 마루위에 두 무릎을 꿇고 빨갛게 얼어붙은 두 손을 꼭 모으고『하느님 저는 하느님의 일이 하고 싶어요. 하느님을 위해 살고 싶어요. 하느님, 제가 가야할 길을 인도하여 주셔요』하고 애원하였다.
한결같은 나의 기도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언제나 같은 소원으로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었다. 교회에는 어머니ㆍ오빠ㆍ동생 모두가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바로 아래 여동생이 슬그머니 예배시간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4시쯤이 되면 친구 집에 다녀온다고 하면서 나갔다가 5시쯤에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동생의 행방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4~5개월이 지나갔다. 어느 날 방에 들어가니 책상위에 목걸이 같은 예쁜 구슬에 십자가가 달려있는 염주가 있고 네모난 봉지 속에 하얀 레이스 수건이 담겨 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 나는 그것이 목걸이인 줄로 알고 목에 걸으려 하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동생이 들어왔다. 좀처럼 화를 내는 일이 없던 동생이 화를 벌컥 내면서 내손에 들린 목걸이(?)를 빼앗아갔다. 『이것이 무엇인데 그러니?』하고 물어도 큰 눈을 굴리면서『몰라도 돼』하고 톡 쏘며 수건까지 모두 빼앗아가지고 문을 쾅 닫고 나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우리 둘이는 한방에서 한 이불속에서 20년이 넘도록 자라면서 서로에게 비밀이 없고 또 언니인 내게 이토록 화를 낸 적이 없었던 동생이었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무얼까? 왜 그토록 화를 냈을까? 저녁에 동생에게 아무리 물어 보아도 대답이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다. 필자가 다니던 감리교회를 내 믿음의 전부로 알았던 나로서는 부흥회가 있기 만하면 며칠이고 열심히 다녔다.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말씀에 매번 은혜를 받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이번 부흥회가 끝나면 목사님과 의논해서 감리교 신학교에 입학해서 더 깊은 신학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면서 부흥회에 나갔다.
그런데 서울에서오신 유명한 목사님이 이세상의 고통과 십자가, 그리고 세상의 우상숭배에 대해 설교하다가 갑자기 천주교회는 가톨릭이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는 마리아를 동고상으로 만들어 세워놓고 모든 신자들이 절을 하고 기도를 드리는 우상숭배의 교회라고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환한 빛줄기가 비춰지는 것 같더니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왜 유명한 성직자가 남의 교회에 대한 험담을 공공연한 공식석상에서 하는 것일까? 무엇인가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이 만족한다면 굳이 남을 헐뜯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혹 가톨릭교회에는 더 깊은 어떤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성모마리아는 누구인가 내 마음속에 솟아나는 질문과 의혹이 더해지는 동안, 목사님의 비판소리는 더욱 높아져 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오늘 있었던 일을 동생에게 이야기 했다. 동생은 빙그레 웃으면서『천주교회가 바로 우리집 앞 소화국민학교 운동장 안에 있어』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두량성이 없고 옆을 동라다 볼 줄 모르는 바보였는지 매일 그 학교교문 앞을 지나 교회를 다녔건만 한 번도 그 학교 안에 위치한 성당에 들어 가 본 적이 없었다.
동생의 말을 들은 그 다음날, 학교 운동장에 들어 가 오른쪽을 보니 정말 파란 띠를 두르고 높이 우뚝 선 성모상과 그 주위에는 넝쿨장미와 잘 가꾸어진 화단이 있었다. 그때는 67년 2월이었다. 아! 이것이 유명한 목사님이 비판하던 성모상이구나. 성모상 옆으로는 뽀족하고 까만 지붕과 빨간 벽돌 사이사이에는 색유리창이 있는 성당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성당을 조심조심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앞이 탁 트인 긴 통로가 있고 양쪽에는 긴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앞을 보니 빨간 등과 네모난 상자위에 물고기 그림, 기다랗고 넓은 보가 덮힌 상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맨 앞 의자 밑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의자위에 놓으며 여기가 바로 내가 믿고 섬겨야 할 하느님이 계시는구나.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를 인도해 주신 성모님 감사합니다. 마냥 눈물이 흘렀다. 개종을 하자. 하느님을 위해 나의 일생을 바치자.
그동안 혼담이 오가고, 선을 보자고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에게 다른 핑계를 대고 여전히 거절했다. 그리고 한 남자에게 매이면 하느님 일을 못할 것이 아닌가. 한 가정에 매이면 하느님 생각이 소홀해 지고 사랑이 부족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고 고린토전서 7장의 말씀『남편이 없는 여자나 처녀는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남편이 있는 여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씁니다』라는 성서 구절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오늘 이같이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신 성모님! 당신 딸이 되고 싶습니다. 나의 삶을 당신께 봉헌하고 싶습니다』하면서 기도했다. 집에 돌아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교회 찬양대, 주일학교 반사 하면서 쓰던 모든 책과 자료들, 찬송가 성경 모두를 모아 즉시 교회목사님께 갖다 드리고 내 생활의 변화를 말씀드렸다.
그러는 동안 동생은 아무도 모르게 영세를 받았으며 3월초에 수녀원에 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무섭게 큰 소리를 치시고 화를 내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께서는 모두 내보내시고 동생에게 무릎을 꿇리고 야단을 치셨다. 모두들 마루에서 벌벌 떨면서 방에서 들리는 큰 호통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너 지금 수녀원에 간다고 하는 말이 사실이냐?』『예』『너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간다는 것이냐ㆍ』『예』『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해야 하는 사람들인 줄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남의 집 철없는 딸을 꼬여 데려가는 나쁜 사람들이구나. 너 이제 내 집 대문을 나가면 다시 돌아와도 받아 줄 수 없고, 호적도 다 떼어 가고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너는 없는 자식이라고 여길 테니 그리 알아라. 그래도 좋다면 가거라』하고 야단을 치시는 데는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처음으로 그렇게 화를 내시는 아버지이신지라 어머니께서도 감히 방에 들어가지 못하셨다. 그래도『안가겠습니다』라고굴복하지 않는 동생이었기에 아버지께서는『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으니 밖으로 나가거라』고 호통을 치셨다.
울면서 쫓겨나는 동생은 자기방으로 갔다. 어머니와 나도 울면서 동생을 뒤따라 방에 들어갔다. 『너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니?』하고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안돼요. 꼭 가야만해요. 내일가기로 되어 있어요. 이제 가져가야 할 것은 이불과 요만 있으면 돼요』하고 나를 보더니『언니 이불과 요를 갖고 내일 나하고 함께 서울에 가 응?』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일인지…
옆에 계신 어머니에게『엄마 내가 내일 같이 가서 보고 살 곳이 못되면 그냥 데리고 오겠어요. 안심하시고 아버지 마음을 위로해 드리세요』하고 말씀드렸다.
이튿날 아버지께서는 화가 안 풀리신 채 아침식사도 안하시고 학교로 가버리셨다. 아버님께 인사도 못 드리고 이불보따리를 싸들고 흐느껴 우시는 어머니를 대문 뒤에 남겨둔 채 서울행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부모님들이 그렇게 우시는데도 태연하고 용감하게 자기 길을 가는 용기가 어디서 생겼을까? 한 번도 부모 곁을 떠나 살아본 일이 없는 우리 형제들이 아닌가? 하룻밤도 남의 집에서 잠을 자본적이 없는 우리가 아닌가? 오늘부터 낯설은 생활이 시작되는데도 왜 동생은 그리도 편해 보이고 나 역시 기뻐지는 것일까?
명동 수녀원 하얀 집에 가서 벨을 누르니 문지기 수녀님은 저 맞은편 큰 문에 가서 수련장 수녀님을 찾으라고 했다. 그곳에 가서 벨을 누르니 어떤 수녀님이 나오셨다. 수련장 수녀님을 찾아 왔다고 하니 잠깐 들어와 기다리라고 하셨다. 조금 있으니 수련장 수녀님께서 나오셨다. 우리 둘을 보시더니 친구냐고 물으셨다. 언니라고 하니 꼭 친구 같다고 하시면서 아주 상냥하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모습에서『참 미인수녀님이시다. 참인자하시고 좋으신 분이구나』하고 말할 만큼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불은 여기에 두고 수유리 신학원에 가보라고 하시는 수녀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는 수녀님께 인사드리고 수유리 신학원에 갔다.
신학원 마당에 들어서니 키가 자그마하시고 대머리에 둥그런 얼굴을 하고 계신 분이 마당에서 계셨다. 동생이 살짝 내 귀에 대고『이 분이 李리노 원장신부님이셔』한다. 동생이 가까이 가서 인사를 드리니 반겨 주시면서 수업이 시작되었다고 빨리 교실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이제 나 혼자서 집으로 내려 가야하는 데도 이상하게 아주 큰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양 발걸음이 가벼웠다. 집에 돌아오니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점심도 굶은 것을 잊어버릴 만큼 힘든 줄을 몰랐다. 어머니는 온종일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어떻게 하고 왔니?』물으시는 어머니에게『엄마, 아주 잘 있게 되었어요. 공부한다고 교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왔어요』하면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리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
어머니께서는 내 말을 받아『지금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고 왔대요』하시니 아버지의 말씀이『그 꺼먼 수건 쓴 사람들이 철없는 남의 딸 공부시켜 준다고 꼬여갔군. 내가 공부 시켜준다고 해도 안하더니…』하시면서 아주 언짢아 하셨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안타까워하시는 부모님들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 다음 주일, 교회에 인사하러갔다. 그런데 목사님과 주일학교교장선생님이 주일학교를 맡을 사람이 있을 때까지만 참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6월에야 개종을 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내가 개종할 줄은 몰랐다면서 나를 붙잡으려고 주일학교 핑계를 대었다고 했다. 매일 장로님ㆍ주일학교 교장선생님이 찾아와서 왜 개종을 하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수녀원에 가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더니 그것은 율법주의로 들어가는 것이고 구약법에 따르는 것인데 왜 그곳에 가려하느냐고 만류했다. 그리고 거기에 가야 꼭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별별 소리를 다하는데도 이제는 내 마음이 정해져 있던 까닭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이제 수녀가 되고 싶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아주십시오』하고 분명히 말씀드리고『다음부터는 안 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인사드렸다.
성당에 나가며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였다. 주일교리만으로는 부족하여 연세가 많이 드신 원장 수녀님과 일대일의 교리가 시작되었다.
수녀님과의 시간은 대부분 질문과 대화의 시간이었다. 그 대화의 문제 중의 하나가 중세 가톨릭의 부패상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문제였다. 그런데 수녀님께서는 그때 모든 잘못을 긍정하시고 잘못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겸손히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찡하니 울렸다. 참 잘 왔다. 유명한 목사님은 많은 군중 앞에서 가톨릭을 성모상 우상숭배라고 비난하는데 이 노인 수녀님이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를 느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참 좋은 곳으로 날 인도하여 주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말씀도 없으신 침묵의 어머니께서 이토록 큰일을 하시다니…. 많은 이들은 저마다 자기를 알아 달라고 감언이설로 떠들어 대건만 성모님께서는 어쩌면 이렇게 말없이 우리 두 자매를 거룩한 가톨릭교회로 인도하여 주시는 걸까? 마냥 기쁘기만 했다.
수녀님께서는 그때부터 책을 하나씩 빌려 주시기 시작하셨다. 「교부들의 신앙」「동서의 피안」「부요 교리 상ㆍ하」등 이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흥미로와져 가는데 8월 15일에 영세식이 있다고 했다. 예비자 교리 기간이 적어도 6~8개월이 되어야 본당신부님께서 영세를 주신다는데 나는 3개월도 안되었다. 꼭 이번에 영세를 하고 수녀원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수녀님께 의논하니 직접 신부님께 이야기해 보라고 귀띔해 주셨다. 그런데 마침 8월 28일 아우구스띠노 성인축일이「신부님의 은경축」이라고 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부님께 떼를 쓸 작정을 하였다. 신부님께 이미 나에 대해서는 동생을 통해서 또 원장수녀님에게서 말씀을 들으신 적이 있었는가 하면 매일 미사 참례하는 것을 보셨던 까닭에 쉽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아침 미사 후에『신부님 저 청이 하나 있습니다』『뭐요?』『신부님 은경축일을 맞이하여 기념으로 교리시간은 못 채웠지만 영세를 주세요』신부님께서는 아주 좋아하시는 표정으로 어금니가 다 보이도록 크게 웃으셨다. 아마 어처구니없는 청이라서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웃으시더니『내일아침 미사 후에 내 방으로 오시오. 찰고 좀 해 봅시다』하시는 것이 아닌가.
마침 그날 오후 동생이 방학을 틈타서 집에 다니러왔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영영 못볼줄 알았던 딸이 왔다고 너무나 좋아하셨다.
아직 청원기도 들어가지 못한 쥬베나 생활을 하는 동생이었다.
다음날 아침 동생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후 신부님께 인사드리니『내 방으로 갑시다』하셨다. 우리 두 자매는 신부님의 응접실에서 찰고를 받았다. 『칠성사』에 대해 또 설명해 주시고 또 대답 후 설명해주셨다. 찰고라기보다는 가르쳐 주시려고 차근차근 알아듣기 쉽게 하나하나 교리를 설명해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좋아, 이번 8월 15일에 영세하도록 합시다』하고 말씀하셨다.
너무 좋아서 수녀원으로 뛰어가 수녀님께 말씀을 드리니 원장수녀님께서도 대단히 만족해하면서 웬일로 까다롭게 영세 찰고하시는 신부님께서 준비기간이 모자라는 예비자에게 영세를 주시느냐ㆍ 하시며 놀라셨다. 원장수녀님께서는 영세명을 무엇이라고 하고 싶으냐고 물으셨다. 나는 힘 있게『내 길을 인도해주시고 개종케 해주시고 이제 수녀원에가기 위해 영세까지하게 해주시는 성모님의 이름을 따라「마리아」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수녀님께서는『전에는 수녀가 되면 수도명을 따로 정했는데 지금은 영세명을 그대로 보존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라는 본명을 정하면 이마리아 수녀가 될 것인데 이 마리아 수녀가 한 수녀원에 너무 많으면 불편할 것 같으니 마리아에 성모님 어머님의 본명인 안나를 연결하여 마리안나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하셨다.
『수녀님 참 좋습니다』하고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나의영세명은 마리안나가 되어 1967년 8월 15일에 영세를 받았다. 영세를 받고나니 어서 빨리 수녀원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런데 수녀원에 입회를 하자면 견진문서가 있어야만 한다. 원장수녀님께 방법이 없겠느냐고 알아보아 달라고 하니 아직 수원교구에 견진성사가 거행되지 않은 본당을 찾아보시더니 안성본당이 8월 27일에 견진성사가 있다고 하시면서 그 곳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도록 본당신부님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주셨다. 그래서 나는 안성본당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제는 수녀원에 입회하는 것만이 남았다. 이모든 일이 성모님의 보살핌이 아니고서 오묘하게 이루어질 수가 있었겠는가?
원장 수녀님께서는 서울 본원에 다녀오시더니 아직 수녀원에 입회의 조건인 영세 후 3년이 채워지지는 않았으나 감리교회에서의 신앙을 참작해서 특별히 입회승인을 얻었다고 하시면서 12월에 입회하도록 준비하라고 하셨다. 너무나 큰 선물을 받은 나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어 하느님께 감사! 성모님께 감사! 마냥 기쁘기만 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 모르게 수녀원 입회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하나하나 장만하기 시작했다. 주일이면 서울에 있는 동생에게 면회가기 위해 새벽미사에 참례하였고 수녀원에 가서 동생을 면회하고 돌아올 때마다 나도 빨리 입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빨리 12월이 왔으면!
그러나 정작 12월이 되고 보니 아버지께 말씀드릴 일이 걱정이었다. 하느님, 성모님 도와주십시오 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아버지 드릴말씀이 있어요』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차마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었다. 『뭐냐?』『아버지 사실은 제가 12월에 수녀원에 가게 될 것 같아요』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리기가 싫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수녀원에 가서 동생이 살만한 곳에서 살고 있는지 남들이 말하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고 있는지 제가 직접 살아보고 정말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맞는다면 데리고 나오겠어요.』동생이 수녀원 문제로 야단맞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야단맞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차분히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한참 침묵을 지키고 계시더니『그래 꼭 수녀원에 가야겠니?』하고 엄숙하게 물으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아버지 제가 수녀 되는 것이 싫으세요?』『너는 네 동생과 같지 않아 철없다고 꾸짖을 수도 없고… 지금까지 너희들 어느 하나 부모께 순종치 않았던 적이 있었니? 그리고 네가 하는 일이 언제 부모에게 걱정을 끼칠 일을 한 적이 있었니? 그런데 이제 네가 이렇게 가야겠다고 하니 말릴 길이 없구나』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게 아닌가? 처음으로 아버지께서 우시는 것을 본 나는 마음이 뭉클해지고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아, 어떻게 하나, 하느님 도와주세요』속으로 기도하면서『아버지 가기는 가보겠어요. 가서 정말 살 곳이 못되면 동생을 데리고 나오겠어요. 너무 심려마세요』하고 쏟아지는 눈물에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방을 나왔다.
12월이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얘야 너는 추위도 남보다 더 타는데 1월이 가장 추운 달이니 이왕 갈 것 추운 1월이 지나고 가면 어떻겠느냐? 그곳은 따뜻한 온돌방도 없을텐데』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원장수녀님께 뛰어가 아버지의 의사를 전하였다. 원장수녀님께서 서울에 가셔서 내 사정을 말씀 드린 결과 본원 수련장 수녀님은 2월 2일에 다른 지원자들이 입회하게 되니 그날 같이 들어오라고 하셨다고 하셨다. 그동안 감리교회에 잘 다니시던 어머니와 동생들도 서서히 개신교를 멀리하다가 필자가 영세하자 결정적으로 가톨릭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2월 2일에 수녀원에 가게 되었으니 성탄 때 영세를 받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해 성탄 때에 신부님의 허락을 받아 어머니와 동생들이 영세를 하게 되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1월 한 달은 주일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성체를 모시고 들어오는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1968년 2월 2일 어머니와 함께 서울 수녀원으로 향했다. 수녀원 응접실에는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자매들. 함께 온 부모님들로 꽉 찼다. 우리 두 자매도 어머니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눈 뒤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했다. 그때부터 수녀원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도 원했던 수녀원 생활! 어찌나 바삐 돌아가는지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갔다. 면회주일이 되면 어머니가 오셔서 우시고 가셨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들 보내놓고 성당에 가서 원장수녀님이나 다른 수녀님들을 만날 때마다 우셨다고 한다.
수련기를 본격적으로 출범하기위한 착복식이 있었다. 이제 부모ㆍ친척을 오시라는 서신을 보내라는 수련장님의 말씀에 집에 초대장을 보냈다. 처음으로 아버지께서 오셨다. 마침 명동 대성당이 공사중이라서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에서 착복식과 종신서원을 했다. 모든 예식이 끝나고 혜화동 신학교 운동장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장시간 휴식을 취한 후 이제 다 같이 명동수녀원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동생들과 차를 타고 오는데 아버지의 말씀이『얘야 이제 수녀학교 졸업했으면 집에 가자꾸나』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면서『아버지 이제부터 시작이예요 아버지 제가 이렇게 좋아졌잖아요. 집에 있을 때보다도 살도 찌고 건강도 좋아 보이지 않으셔요?』하고 위로해 드렸다. 그리고 나는 명동에서 내리고 섭섭해 하시는 아버지 어머니와 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나의 첫 서원식이나 종신 서원식에도 오시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나 혼자만 떼어놓고 갈 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괴로운 마음을 느끼신 나머지 다시는 안 오시겠다고 다짐하시고는 그 후로는 어머니와 동생들만을 보내시곤 하셨다.
동생은 쥬베니스에서 2년간 학교를 다녔다. 수녀원에 먼저 입회했으나 쥬베니스 생활을 하고 나는 직접 수련소에서 수련을 받았다. 2반 노비스가 되었을 때 동생은 수련소로 오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 두 자매는 성모님의 보살핌으로 수녀가 되었다. 첫 서원을 하고 동생과 함께 집에 휴가를 갔다. 아버지는 딸 수녀들을 볼 때마다 점점 반가이 맞아주셨다. 그리고 대견해하시고 아주 만족스러워 하시면서 식사 때는『밥맛이 더 좋구나. 너희들이 오니까』하시며 식사도 더 많이 하셨다. 아버지의 선물로 담배 한 보루를 사가노라면 아버지께서는 학교에 가져 가셔서 선생님들께 하나씩 나누어 주시고는『우리 수녀 딸들이 사 온 것이라 아주 맛이 좋습니다. 피워보십시오』하시더라는 것이었다.
기쁨과 슬픔의 교차 속에서 정든 부모 형제를 떠나 수녀가 된지도 이제 어언 20년이 지난 오늘, 성모성년을 맞아 성모님은 실로 모든 성소의 어머니이심을 더욱 깊게 새기게 된다. 더욱이 수도자로 불러 주신 성모님은 사목을 하는 중에도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신다.
사목하는 동안에 체험한 일들 중의 한 가지를 소개해 본다.
어느 날 신자 한분이 찾아와 자기 동생이 위암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세를 주고 싶다며 함께 병원에 가자고 했다. 바삐 병원에 가보니 23세의 예쁜 아가씨가 중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그래서 수술을 하기 전에 신부님을 모셔다 영세를 받게 하고 수술을 받게 했다. 그러나 수술결과, 이미 너무 많은 암세포가 퍼져있기에 병원측에서는 퇴원을 해서 먹고 싶은 것이나 먹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제 3~4개월의 삶만이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그 후 환자언니는 이제 절망적이라면서 오늘 퇴원하여 시골집에 가면 수녀님이 오시기 어려울 테니 퇴원하기 전에 병원에 있는 동생 루시아를 한 번 더 찾아 봐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환자언니와 함께 병원에 갔다. 병실문을 들어서니 루시아가 흰 시트커버를 뒤집어 쓰고 똑바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커버를 열고 보니 루시아가 눈물범벅이 되어있었다. 본인은 물만 먹어도 토하고 위가 아픈데 퇴원하라고 하니 이제 죽는 것 밖에 남은일이 없다면서 울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암담한 일이었다. 『루시아, 우리 성모님께 기도하자』하고 달래니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간 신자들과 묵주의 기도를 바치고 성모님께 치유의 은사를 전구해달라고 기도했다.
『루르드에서,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 그리고 루르드의 기적수를 통해 많은 불치의 병을 고쳐주시는 성모님 이제 이렇게 고통 중에 있는 당신의 딸을 굽어보시어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당신 아들 예수께 전구하여 주소서』그리고 루시아에게 부탁했다. 『퇴원해서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성당 레지오단원들에게도 루시아를 위해 9일 기도로 묵주의 기도를 바치도록 할테니 루시아도 꼭 기도하자』
퇴원을 해서 시골집에 가있는 루시아를 몇 번 찾아 갔었다. 그런데 성모님은 여기서도 또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셨다. 병원에서 물만 먹어도 토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루시아가 죽을 먹고 차츰차츰 밥을 먹고 건강이 좋아지는 것이 아닌가? 온 가족이 모두 하느님을 믿고 기도해야 산다는 교훈을 보았기 때문에 교리를 배워 영세를 하게 되었다. 루시아는 건강하게 성당을 다니게 되었다.
이렇게 성모님은 불치의 병 환자를 통해서 또 한 가정을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시고 평화를 갖게 주셨다.
2년 후 병이 재발되어 환자는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죽음 앞에 너무도 편안히 그리고 정말 천국이 있다는 희망을 가족들에게 알려주고 이 세상을 떠났다. 남아있는 가족들은 언젠가는 사랑하는 딸ㆍ동생을 만난다는 희망으로 오늘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볼 때 성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저 감사롭기만 하다.
그 옛날 성모님께서 내 길을 인도하여 주시고, 빛을 주시어 또한 거룩한 성교회의 수도자로 불러 주신 은혜.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어느 것 하나 빈틈없이 안배해 주신 크나큰 은총에 한없이 머리를 숙여 감사드린다. 그렇게 완고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던 아버지, 나중에는 수녀 딸들을 제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영세준비를 하시다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에 가셨다.
그리고 교리를 가르쳐주시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기까지 힘써 주시고 붙잡아 주셨던 이 일마 수녀님도 하느님 나라에 계신다. 또한 우리 두 자매를 영세시켜 주시고 수녀원에 들어 갈 수 있도록 추천해 주시고 우리 엄마, 동생들을 영세 입교시켜 주셨던 유봉구 신부님도 하느님 나라에 계신다. 내 길을 인도하신 이 모든 분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성모님과 함께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계시리라.
4월 10일자 가톨릭신문에 창간 61돌 작품모집을 보는 순간 내 생애에 이렇게 거룩한 성모성년을 또 맞이할 수 있을까, 없다면 이 성모성년에 성모님께 보답하는 의미로 성모님을 통한 성소의 길을 걷는 나의 작은 생활을 한 번 써보고 싶은 마음에 성모님께 이 글을 봉헌한다. 예비자 교리시간이나 교도소 교리시간에 신자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들에게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를 믿는 우상 숭배하는 교회라고 하는데서 생겨나는 의문점이다. 수없이 이런 질문을 받아왔기에 더욱 더 성모성년을 맞이한 이 해에 성모님을 통한 은총과 모든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는 중재자이심을 나의 과거경험을 통해 증언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의 지난 이야기를 들춰보았다. 그리고 성모님께 나의 노래를 조용히 바쳐본다.
오! 성모 마리아여!
나의 길을 비춰 주신 어머니 마리아
지금의 나를 만드시기 위해
미리 미리 준비해 놓으시고
어려울 때마다 당신의 치마폭에
감싸주시던 어머니.
내 심장의 마지막 고동소리가 울리는
그 순간까지
당신의 보살핌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께서 오라 부르시는 그 날
내 삶을 영원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그날.
당신의 아들 예수께
모든 성인 성녀들과 함께
영원한 찬미드릴 수 있도록
전구하여 주소서 아멘.
가족도 하나둘 성당門 두드리고
동생 뒤이어 수녀원에 入會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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