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시름 속에 뼈만 녹아나고 밤낮으로 당신손이 나를 짓눌러 이 몸은 여름가뭄에 풀 시들 듯 진액이 다 말라빠지고 말았습니다』(시편32)
위의 시편의 말씀처럼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흘러 옷이 젖어버리고 더위 때문에 나태함과 무기력에 빠져 들어가 버린 여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얻어 산과 바다로 떠나고 있을 때 한증막 같은 내방에 앉아있노라니 떠날 용기가 없는 나 자신이 밉고 공연한 피해의식이 슬그머니 앞선다.
더위를 피해 파도치는 강릉의 시원한 바닷가로 향해 고속버스에 몸을 실어볼까?
여름의 삼복더위도 얼어붙게 한다는 지리산계곡의 뱀사골이라도 찾아가볼까?
아니면 지독한 공포로 복더위마저 삼켜버린다는 후레드 데키가 감독한「악마군단」이란 영화라도 보러 갈까?
잠시 정신을 차려 냉장고에서 냉수 한잔을 마셔보지만 더위는 떠나가질 않는다.
그러다가 FM라디오를 틀어보니 이남이의「울고 싶어라」란 노래가 더욱 더위를 더한다.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시원한 노래를 틀어주지 않는 DJ가 밉살스럽다. 「아마」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오는 그 노래를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한 시원한 바람은「아마」떠나갈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여름은 예년보다 한 달 앞당겨 왔기 때문이지 더욱 무더웠다. 그 결과로 본격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선풍기、에이콘 등 가전제품들이 품귀현상을 빚었고 청량음료 등 여름상품업계가 호황을 누렸다.
올해가 유난히 덥게 느껴지는 것은 날씨 탓도 있겠지만 아직 풀어야 할 난제들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난해의 무더위는 민주화를 향한 열기로 식힐 수 있었다. 민주화를 위해 행한 일주일간의 단식으로 시위군중과 함께 외쳤던 구호로 더위를 잊을 수 있었으리라.
아직 속 시원한 해결을 보지 못한 제5공화국의 비리들과 광주민주항쟁의 실태 그리고 숱한 파문들을 일으키는 발언들이 이 여름 공연히 더운 바람만 일으키고 있는 건 아닐까?
더위를 식힐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외적인 옷을 벗어버릴 때 잠시 더위를 잊을 수 있고、내적인 옷을 벗어버릴 때 더위를 완전히 쫓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름날 미사시간에 보면 주보를 부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해수욕장으로 착각을 하는지 준수영복차림으로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내복을 5월말까지 입는 나로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벗어 제치는 용기 있는 사람을 볼 때 한없이 존경스럽다.
인간이 언제부터 옷을 입었기에 걸친 옷 때문에 거추장스러움을 느끼면서 살아가야만 할까?
하느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신 후에 아담과 하와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명하신「동산에 있는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나무열매만은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그 열매를 먹자 그들은 눈이 밝아져 알몸임을 알고 몸을 가리웠다.
인간의 범죄는 자신이 알몸임을 깨닫게 하고 알몸을 용납하지 못하는 삶으로 바꾸어놓았다. 인간은 이때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고 하여 요즈음 같은 여름 더위로 인해 고생을 하는 삶으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옷을 아무리 껴입는다 해도 추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고、옷을 아무리 벗어버린다 해도 더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생각된다.
무더운 여름철을 맞아 팬티와 브레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여성이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한다. 이에 편승해서 남성들도 동참(?) 런닝셔츠와 팬티를 입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단다. 이러다가 누드촌이 생겨나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인간이 결코 근본적으로 더위를 극복할 수 없으며 외적인 옷은 벗을수록 더울 뿐이다.
얼마 전 미국의 어느 지방에는 가뭄이 들어 비가오지 않아 온갖 과학적인 방법까지 동원했으나 허탕을 쳤다. 그러자 주민들이 하느님께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 TV를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또 다시 뼈저리게 느꼈다.
무더위를 식힐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자연적인 바람뿐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현대인들은 인간적인 능력과 힘을 너무 믿고 있지는 않는가?
가자! 우리모두하느님께로 달려가자! 지난해에 일으켜주셨던 엄청난 바람을 오늘 이 시대에 다시 일으켜 주십사고 기도하자! 하느님의 바람이 불 때만이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난제들의 옷이 벗겨져 알몸이 되리라.
하느님의 바람이 불 때 성민호가 부른「바람 부는 세월」의 노랫말처럼 나 자신의 작은 가슴도 슬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때 가슴을 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불어라! 하느님의 바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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