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비추기엔 아직 이른 새벽 6시.
할머니는 슬며시, 주무시던 이불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따뜻하게 옷을 차려 입으신 후 힘겹게 일어서셨읍니다. 그리고 방문옆 벽의 위쪽에 걸린 십자가상을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만 뭔가 혼잣말로 기도를 하시는 듯 했읍니다.
아침 미사를 가기전에 할머니께서는 으례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곤 하셨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기도가 여느때와는 달리 긴 느낌이 듭니다. 방문을 살며시 열고, 신을 신고 삐그덕 현관문이 열리고 나서야 할머니의 발걸음은 안심스러운듯 편안합니다.
할머니는 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랍니다. 할머니는 성당에 다니시는데 성당일은 물론 마을의 궂은 일도 도맡아 하셔서 감초 할머니라고 소문이 났을 정도니까요. 고아원의 불쌍한 아이들에겐 친 부모처럼 사랑을 나눠주고 양로원에 가서는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노인들과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신답니다. 그런데, 작년 크리스마스에 일어났던 일로 인해 할머니는 성당을 구한 용감한 할머니로 모든 달동네 주민들의 존경을 얻게 됐읍니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달동네본당은 온통 난리법석입니다. 모두들 하루하루 생활에 지쳐있지만 크리스마스만은 즐겁게 보내려는 것이지요.
크리스마스에 쓰일 전나무 한 그루, 반짝반짝 빛나는 꼬마전구들, 주렁주렁 매달 종 등 모두 소중한 것들입니다. 달동네 아이들도 모두들 들떠있읍니다. 올해 크리스마스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꼭 오실까? 어떤 선물을 주실까? 난 인형도 갖고 싶고 장난감 자동차도 갖고 싶은데… 아니, 그건 그렇구 정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란 사람이 있긴 있는 걸까? 아이들은 고작 선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지만 어른들은 더 큰 걱정이 있읍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기대에 실망을 시키지 않으려면 무엇으로 선물을 마련하나. 또 더 큰 문제는 볼품없는 성당 건물입니다.
이 성당은 충실한 믿음으로 이제까지 버텨온 보잘 것 없는 건물일 뿐, 무허가 건물에다 여러가지 복잡한 땅 문제로 얽혀있는 건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골치 아픈 건물이죠.
몇 달 전만 해도 이 땅의 주인이다, 동사무소 직원이다, 토지개발 계획 공사장이다 뭐다해서 여러 차례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문제는 시작되었읍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안으로 이 건물은 철거를 당해야만하는 것입니다. 땅을 사서 반듯한 새 건물을 지으면 되는데 문제는 돈입니다.
달동네 사람들의 생활은 불보듯 뻔한데 이 사람들에게서 많은 돈을 구할 수 없읍니다. 그렇다고 선뜻 나서서 도와주는 독지가는 더더욱 없고…… 할머니와 달동네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 의논을 했읍니다. 의논 중에는 은행 융자를 받아보자, 철거 일을 봄까지라도 연기시킬 수 없을까, 누구 집을 성당 대신으로 쓰자 등등 별의별 의견이 다 나왔읍니다. 그러나 좀처럼 시원한 의견은 나와주질 않았읍니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할머니는 말했읍니다.
『아무래도 성당을 다시 지어야겠읍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녀봅시다. 어떻게든 자그마한 성당 한 채라도 지어야 해요』
그 다음날부터 달동네 사람들은 돈 구하기에 바빴읍니다. 할머니도 이곳저곳 큰 성당을 주로 다니며 신부님, 수녀님을 붙잡고 의논하고 간청했지만 모두들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했읍니다. 또, 땅주인에게도 찾아가 그를 설득하려 애썼으나 할머니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고, 그날은 다리가 퉁퉁 부은채 달동네로 향해야만 했읍니다. 동네 입구 쪽의 허름한 성당을 바라보고 할머니는 기도합니다.
『주님, 왜 주님은 우리와는 아득히 먼 곳에서만 계십니까. 우리처럼 진실한 믿음으로 주님께 의지하려는 가여운 자식들을 왜 외면하십니까, 네? 주님』그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읍니다. 『성당을 구해야해. 아암, 구해야 하고 말고…』그날 밤, 할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끙끙 앓고만 지새웠읍니다.
어느덧 크리스마스 이브가 다가오고 그와 동시에 성당 철거하는 날도 다가오고 있었읍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데도 달동네는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자기들의 성당이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고 난리였읍니다. 할머니께 찾아온 아이들은 걱정스런 얼굴로 진지하게 물었읍니다.
『우리 성당은 이제 없어지나요?』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입니다.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나요? 우리 성당 안 없어질 방법요』
그저 고개만 가로저으십니다. 그 때 코흘리개 어린아이 하나가 물었읍니다.
『하느님은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에 따로 하나씩 있나요?』그러자 할머니는 말씀하셨읍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야』
『그렇다면 그건 거짓말이예요 하느님은 지금 무얼하시죠? 우리 동네 하느님은 가난해요. 그래서 돈이 없어 성당을 안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할머니는 그 꼬마를 끌어안고 그만 목메어 말씀을 잇지 못하셨읍니다.
『그…그래, 우리 동네 하느님 참 가난하시다. 부자 하느님은 왜 우리를 버리실까. 이 불쌍한 아이들을…』
기뻐해야할 크리스마스 이브인데도 오히려 모두들 우울해 있고 만들다만 트리가 성당 한 구석에 멋적은 듯 서있을 뿐입니다.
성당에 모인 동네 사람들에게 할머니는 말씀하셨읍니다.
『내일 크리스마스까지 성당철거를 연기시켰읍니다. 그러니 마지막 성탄절은 뜻있게 보내도록 합시다. 특히 아이들에게 잘 말해주세요. 박신부님과 윤수녀님도 내일 모레쯤 다른 본당으로 옮기실테니까 우리가 잘 보내드립시다』그렇게 해서 기뻐야 할 크리스마스 이브는 우울한 날이 되었고 이날엔 산타클로스도 오지 않았읍니다.
다음날, 성탄절의 아침은 밝아왔읍니다. 아침이 되자 성탄미사를 보러 온 동네 사람들로 좁은 성당은 가득찼읍니다. 이 성당에서는 마지막 미사 보는 날이자 마지막 크리스마스. 모두들 슬프고 서러운 음성으로 성가를 불렀읍니다. 영성체도 어느덧 끝나고 묵상시간이 되어 모두들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갑자기 성당 문이 덜컥 열리더니 말쑥한 양복차림의 여러 사람과 수녀님이 들어왔읍니다. 수녀님은 들뜬 목소리로 말씁하셨읍니다.『여러분! 우린 이 성당에서 계속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읍니다.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예요』
사람들은 웅성거렸읍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이게』
『정말인가?』
『어머나 세상에…』
말쑥한 차림의 신사중 제일 나이가 지긋한 노인 한분이 뚜벅뚜벅 제단 앞으로 나서더니 말을 하였읍니다.
『여러분, 저는 이 성당 땅의 주인입니다. 사실 이 성당을 내일 철거하려 했읍니다만 어제 어느 할머니 한 분이 찾아 오셔서 하는 말씀을 듣고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읍니다』 사람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읍니다.
『사실 전, 이 허름한 건물을 싹 치우고 좋은 건물을 지을까 했읍니다.
그런데 이 건물은 제가 보는 허름한 건물 이상으로 여러분들께 소중한 건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읍니다. 저에겐 한낱 허름한 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 건물은 여러분의 고된 삶을 영원한 믿음으로 만드는 그런 구실을 해왔던 것입니다.
주님만 알고, 주님만 따르기로 생각하고 이곳에 모여 믿음을 충만케 했던 곳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이 땅의 주인은 달동네 신자 여러분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환호성 쳤읍니다.
“달동네 본당 만세!”
“달동네 하느님 만세!”
“감초 할머니 만세!”
퇴장성가는 모두가 함께, 크게 소리높여 불렀읍니다. 아마도 이 우렁찼던 성가는 저 멀리 하늘나라에 계시는 하느님께서도 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날 밤 이 달동네의 하늘에는, 먼 옛날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을 때 동방박사들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던 큰 별이 다시 떠 언제까지고 떠날 줄을 몰랐읍니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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