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에게 띄우는 글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더불어 어느덧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입시라는 멍에를 어깨에 지고 있는 후배 여러분들에겐 가을이란 단어가 오히려 타는 목마름을 가중시키리라 생각됩니다. 더구나 이제 3개월 후면 입시를 치르게 될 고3후배들, 여러분들의 초조함은 아마도 극에 달해 있겠지요.
벌써 오래전의 일이지만 나 역시 유난히 무덥고 짜증스런 여름날을 그리고 나와는 상관없는 계절인 듯 안타깝기만 하던 가을밤들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결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시절이었지요. 지금도 입시 이야기만 거론되면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입시병」이 나를 괴롭히곤 한답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요.
해서, 될 수 있는 한 입시라는 단어와는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해온 터였지만 그동안 수차례 일어났고 또 앞으로도 가능성이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염려하면서 이렇게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바로 여러분에겐 누구보다도 충격이었을, 여러분 친구들의 「어이없는 죽음」때문이랍니다.
이미 지나간 아픔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남은 3개월이란 한계 속에서 어쩌면 다시 한 번 좌절과 절망의 늪 속으로 빨려들어 갈 수도 있는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것이라는 의무감이 나에게 어려운 펜을 들도록 만들었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자살은 여러분의 선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입시가, 시험이, 자살의 요인이 될 수는 도무지 없는 일이지요. 물론 이글에 대한 여러분의 항변이 무엇인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점수 제일주의」「일류 지상주의」가 부른 입시위주의 교육제도 등 잘못된 교육제도 그것은 여러분의 항변만이 아니라 선배인 우리 세대도 함께 느끼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고백했지만 나도 여러분과 같은 고통의 시절을 어김없이 겪었답니다. 땅의 자손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보내야했던 그 고통의 시절, 나를 포함한 우리 친구들은 좋은 학교를 가는 것만이 훌륭한 인생을 사는 오직 하나의 길로만 생각했었지요.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가 없었던 그 경직의 세월, 학교도, 학생도, 가정도, 사회도 오직「일류라는 병」을 앓고 있는 중병환자들이었답니다.
그 환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했던 우리들은 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좋은 학교만이 좋은 인생으로 가는 오직 한길로 여겼던 우리의 판단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여러분의 친구, 사랑하는 후배들을 잃은 비극은 옳지 않은 사실들이 수정되지 않고 오히려 보다 철저하게 무장된 채 지금에까지 이어진 우리의 현실에서 비롯됐음은 분명합니다. 억울하고 안타까움이 큰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맹세코 장담하건데「좋은 학교」=「좋은 인생」이라는 등식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성립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후배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늘 우리 사회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ㆍ발전되고 있습니다. 다양한모습의 사회는 당연히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을 요구합니다.
서글픈 것은 이 같은 사실을 여러분 보다 한발 먼저 삶을 살았던 선배들이 자신들이 겪었던 그 아픔의 시절을 이미 망각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나는 직업상 여러 나라들을 돌아볼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언어, 따른 문화, 다른 풍습에만 흘려 놓쳐버렸던 아주 중요한 부분을 나는 최근의 해외여행을 통해 발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름 아닌 그 나라 젊은이들의 모습, 그 정신을 접해보려는 노력이었답니다.
즉 내 관심의 초점을 과거의 영광ㆍ영화의 편린들을 뒤쫓기보다는 오늘날 서구 젊은이들의 생각과 삶을 만나보는 쪽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이지요. 비록 단편적인 만남이긴 했지만, 나는 첨단과학의 발전과 물질만능의 현실은 안락과 만족을 가져다주었으며 미래까지 약속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의 눈망울에서 읽어 낼 수가 있었답니다.
분명하게 얻어진 결론은 그들에게 비해 우리의 젊은이ㆍ학생들이 참으로 건전하고 겸손하며 아름답다는 사실입니다.
입시라는 종착역을 향해 철저히 삶을 유린하고 있는 악조건 하에서도 여러분의 눈망울이 풋풋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은 진정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험에의 압박과 입시공포 속에서도 생기와 발랄함을 잃지 않는 여러분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밝은 미래를 약속해주는 「보증수표」와도 같기 때문 입니다.
잠깐 펜을 놓고 눈을 감아 보십시요. 그리고 남은 3개월을 생각해 보십시요.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내야 할 시간들에 비한다면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잚은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십시요. 그동안 여러분이 쌓아올린 학업의 전 과정을 한번씩 숙고해보는 시간으로 남은 3개월을 쪼개어 본다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거기엔「최선」이란 단어가 필요하겠지요. 최선을 다한 뒤 오는 결과를 여러분은 책임질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누가 책임을 묻는다면 과감히 도전하십시요. 다양하게 펼쳐져있는 또 다른 세계를 선택하는 「도전」말입니다.
여러분의 그 같은 도전이 계속 된다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비롯, 비합리적인 입시제도ㆍ오도된 직업관등 구조적인 모순들이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최선을 다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분야에서「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짧은 인생살이를 통해 얻은 이 확신을 나는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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