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부여된 조건하에서 최선의 길을 밟는다. 그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는 생각에 따라 다르겠으나 대개는 돈을 벌거나 권력을 쥐거나 명예를 추구하는데 모든 정성을 기울이고 또는 의도한 욕구의 충족을 누리기도 한다. 그러나 왕왕 그러한 외적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교양의 결핍, 도덕성의 허약 등으로 행하는 짓이 우습고 미련한 속물이란 멸시의 대상으로 남게됨을 본다. 인간의 일부가 예나 이제나 그리고 세계의 곳곳에서 연출한 미련함에는 끝이 없다. 그의 태반은 힘없는 대중보다는 돈이나 세도나 학식을 갖춘 상위의 계층에서 저질러졌다.
누구는 6억원짜리의 저택에 살면서 부부 따로의 호화판의 벤쯔 승용차를 굴리고 몇 백만원짜리의 외제 골프채를 메고 다닌다하고 누구는 자녀의 결혼에 1억원이 넘는 패물, 3천만원어치의 예단, 2천만원짜리의 농을 마련하였다고들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 부럽다기보다는 멸시의 감정이 앞섬은 사촌이 논을 샀을 때에 배 아파하는 심사와 같은 것일까. 물론 수완껏 벌어서 잘사는데 무슨 잔소리냐 하면 그만이겠으나 하루 10시간 노동을 해서 월급이 10만원이 조금 넘는 불쌍한 근로자도 많이 있음을 생각할 때에 그리고 월 12만원 정도의 임금을 요구, 항거하다가 분신 사망한 애절한 인생도 있었음을 생각할 때에 상상을 초월한 극도의 호사를 즐기는 자들은 양심도 없는 미련한 속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근래에 대학의 캠퍼스 곳곳에서 구호를 외치고 최루탄을 쓰고 돌을 던지고 잡아가고 밑도 끝도 없는 싸움이 벌어지곤 하였다.
왜 사람과 사람사이에 그것도 양식을 갖춘 것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불가능하고 물리적인 충돌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적어도 어느 한쪽이 미련하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슬기롭고 정직하고 마음을 비우면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며 힘 대신에 덕으로 미움대신에 사랑으로, 어거지 대신에 순리로 문제를 풀어보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우리 국민의 수준이 낮다는 말인가. 최근에 용공이나 좌경이니하는 반갑잖은 젊은이가 늘어나고 있다는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며 정치체제에 대한 반항은 머리가 좋다는 학생들이 많은 대학일수록 우세하다니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어째서 특히 똑똑한 사람들과 등을 지고 있을까.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과 거의 전원이 스승에게 등을 돌리고 야유를 하고 동창생인 고관 앞에서 퇴장을 했다니 모두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그 회화적 사건의 대상자들이 덕이 없는 때문으로 밖에 해석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수모를 겪으면서 그 높은 자리에 버티고 있음은 파렴치해서가 아닐 것이고 미련해서일 것이다.
사실 미련한 인생은 부지기수로 볼 수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 더러는 폭정을 행하고 불의와 억압에 반항하는 시민들을 힘으로 짓밟아 박해하고 죽이기도 하였으며 문제를 덕과 정직과 순리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힘과 사기와 강압으로 해결하려 하였음을 본다. 그들이 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폭력과 야만의 상징으로 밖에 비치지 않을 때에 그리하여 아무리 허세를 부리고 목에 힘을 주어 의젓한체 하여도 대중들의 마음속에 전혀 인간적인 존경과 매력이 없고 교양없는 속물로 웃음거리가 되고 또는 역사상의 웃음거리가 될 때에 그리고 더욱 두려운 것은 하느님과 원수가 될 수 밖에 없을 때에 그것은 얼마나 미련한 삶인가. 아무리 태산같은 돈을 벌어도 불우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줄 모르고 스스로의 호사생활 이외에는 안중에 보이는게 없다면 잘 먹고 살이 띵띵찐 동물과 무엇이 다를까. 아무리 저명한 지식인이라도 곡학아세의 어용학자로 일신의 영달을 추구한다면 그들은 지조를 파는 일종의 창녀가 아니고 무엇인가. 종교의 지도자라는 사람들 일부가 인권의 문제에는 무관심하면서 부도덕한 권력에 아부하고 불의에 타협하고 있음을 볼 때에, 어떤 법관이 그의 자리의 안전을 위하여 고뇌와 양심의 가책을 무릅쓰고 내키지 않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방청객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때에, 크리스찬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더러가 미신을 따라 궁합을 보고 띠를 따지고 점을 치고 함을 들을 때에 그저 미련하게 보이고 가소롭기만 하다.
인간이 미련하게 처신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세속적인 가치만을 중시하고 도덕성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고 노루의 생피, 곰의 발바닥을 먹기도 하고 뱀, 두꺼비, 두더지, 개구리, 지렁이 등을 먹기도 한다지만 정신적인 또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전혀 대비가 없고 그에 대한 의식조차도 없다. 육체적인, 동물적인 본능만 발달하고 정신적인, 도덕적인 훈련이 없기 때문에 양심의 기준이 애매하고 정의와 불의의 구별이 애매하고 순결의 신비를 비웃고 사랑의 힘보다는 주먹의 힘을 믿고 순리보다는 폭력을 앞세우고 때로는 존경을 강요하고 역사를 속이려한다. 세속적인 영달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있으니 인생을 걸고 돈과 권력과 욕정과 허세를 추구한다. 거슬리는 자들을 박해하며 심지어 필요에 따라서는 잔학하고 야만적인 고문을 자행하여 인권을 짓밟으면서 양심의 가책은 고사하고 눈 깜짝않고 거짓말을 한다. 미화된 속물들이 이렇게 미련하게 살아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이 시급하게 갖추어야할 것은 도덕성의 회복과 그에 따른 양심과 교양일 것이며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한다. 세속의 법과 하느님의 법이 충돌할 때에는 우리의 선조들 일부는 목숨을 바쳐서도 하느님의 법을 따랐다. 그것이 세속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장 바보스러웠지만 그들의 영광은 영원하고 불의의 박해자들은 망하였으며 사람들은 죽일 수 있었으나 정의와 양심은 죽일 수 없었다. 아무리 돈과 힘을 갖추고 화려하게 허세를 부려도 역사와 인간 앞에서 존경과 사랑대신에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기를 택하는 인생만큼 미련한 인생은 없다.
천하를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이 양심과 정의의 편에서 떳떳하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삶이며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따른 삶이고 사랑과 희생의 삶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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