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과 관심 속에 연재되었던「드망즈 주교 일기」가 51회로 마감되었습니다. 이번호부터는 본보 창간 61주년을 맞아 이 땅에 가톨릭문학의 확산과 정착을 목표로 실시한「제1회 가톨긱 문예작품공모」에 출품한 작품들 중 입상에서는 제외되었으나 애용이 우수한 신앙수기들을 연재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과 관심을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편집자註>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루가15ㆍ7)『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사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 38~39)
저의 출생지는 개성이지만 자라난 곳은 황해도 연백입니다.
어렸을 때 늑막염을 심하게 앓고 난 뒤로는 늘 건강이 좋지 않아서 허약한 몸에 마음 또한 여리고 의지가 약한 저였습니다. 그렇지만 두뇌는 명석해서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줄곧 1등을 했으며 군대에 들어간 뒤로도 1등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위사람들로부터 똑똑하고 예의바르다는 칭찬을 들었고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장차 의사가 되어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하여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포부가 큰 것에 비례해서 자존심도 남달리 강했습니다.
집이 가난했고 등록금을 낼 때마다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던 저는 학업을 포기하고 인천 큰형님 댁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학업의 계속을 어려움을 알게 된 저는 공군에 뛰어들어 갔습니다. 의사가 되겠다던 희망은 깨어졌으나 공군에서 조종사가 되어 멋있는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생각했었던 거지요.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저는 기상장교과정을 걷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임관해서도 인정받는 모범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심하게 각혈을 하며 쓰러졌습니다. 과도한 업무와 건강을 돌보지 않는 무절제한 생활 때문이었습니다.
수송기로 후송되어 기지병원에 누워있는 나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고 처량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초 겨울날 앙상한 가지에 홀로 매달려 떨고 있는 나뭇잎과 같이 느껴지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무엇인가에 의지해 보고 싶고 위로받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기지교회를 찾아가 그곳에서 영세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첫 응답이었습니다.
영세는 했지만 저는 제대로 교회지식을 갖추지도 못했고 마치 돌밭에 뿌려지 씨앗과 같아서 제대로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의무적을 주일미사에 참례하여 두려운 하느님을 대하는 신자일 뿐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하도 병치레를 많이 해서 어머님이 점을 쳐 보셨는데 아홉 고비를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속에는 늘 스물아홉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잠재의식과 강박관념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영세 후에도 그 강박관념은 사라지지 않아서 부모님이나 주위에서 결혼을 권해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위 때, 중학교에 교편을 잡고 있던 지금의 아내를 소개 받고는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후일 그를 통해 당신께로 이끌어주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때는 이미 신앙생활에서 완전히 떠나 있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잠자고 있는 내 마음을 뭔가 모르게 흔들어 깨우는 듯한 충동을 느끼게 되어 성사도 안 보고 영성체도 안 하면서도 미사에 참례하며 아내에게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성당엘 나가면 나도 함께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뭔가 모를 충동으로 말은 했어도 저는 여전히 냉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하느님은 저에게서 멀어져 갔습니다.
딸 아들 남매를 얻었고, 아내는 가정을 잘 꾸려 나갔습니다. 애들도 잘 자라고 행복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령으로 진급되고 사천비행장으로 전속되면서 저는 걷잡을 수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했습니다. 공연히 아내가 미워지고 보기 싫어지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돌게 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동료들과 어울려서 밤새도록 화투짝과 씨름하다가 월급봉투를 털리기도 했고, 폭음으로 정신을 잃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술상을 뒤엎고 주사를 부리는 일이 늘어갔습니다. 가정에 충실했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도 있었지만 점차 그런 마음도 없어지고 아내에게 대한 미안한 마음이 반대로 미움으로 변해갔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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