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볼 수가 없다. 굳이 두 손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보기 싫은 것,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두 눈만 감아버리면 간단히 끝이 난다. 보기 싫은, 아니 보고 싶지 않은「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사람들이 최근 우리 모두의 분통을 있는대로 터뜨리게 하고 있다.
자기들이 보고 싶지 않다고 가린 두 손은 그 손바닥 크기만큼 세상을 가렸을 뿐 우리 모두의 눈을 한꺼번에 가리진 못했다. 그래서 진실은 자라났고 진실 그 자체의 힘으로 세상에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진실의 힘은 결코 스스로 폭발한 것은 아니었다. 故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검찰의 발표를 놓고 상당한 부분에서 의문을 가지면서도 막강한 공권력 앞에 눈치만 보고있던 사람들 가운데 진리의 횃불을 높이 밝혀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정의구현사제단」이 바로 그들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 가운데 『故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폭로는 사제단 결성 후 14년 활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신문용어로 따지자면 「특종 중의 특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여러 일간지들이 박군 사건에 대해 새삼 시시콜콜, 신나게 두들겨대고 있지만 사실, 사제단의 처음 발표에 대해서는 극히 소극적인 자세로 몸을 움츠렸었다. 지난 18일 저녁 「광주 사태 7주기 추모미사」직후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표 김승훈 신부가「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파격적인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낭독했지만 다음날 조간ㆍ석간지들은 이를 한마디로 압축해 다루었을 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
「터닝 포인트」는 사제단의 폭로에 대한 검찰의 반응인 듯 했다. 눈치를 살피던 언론의 화살이 이때를 깃점으로 튕겨 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앞엔 두 명이 아닌, 다섯명의 고문치사 범인들이 새롭게 나타나 우리를 경악시켰다.
처음, 사제단은 사건의 진실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면서 구속 사태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진실을 밝히는데 구속을 생각해야 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상식을 벗어난 얘기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결국 빗발치듯 들끓는 여론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굴복했음인지 진실은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진실에 대한 확신으로 구속사태도 불사하겠다는 사제단의 결의는 결국 어둠에 묻힐 뻔했던 박군 사건의 진상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이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란 말이 이처럼 실감날 수가 있을까.
원래 박군사건은 「탁」하고 치니「억」하고 죽었다는 어이없는 발표에서부터 은폐의 조짐을 보였다. 순진한(?) 사람 몇명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바보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장한 젊은이의 심장이 「탁」하는 소리에 멎어버릴리가 없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같은 의혹들은 결국「고문치사」라는 엄청난 사실을 세상에 내놓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깊은 문제는 여론과 현실에 굴복, 큰 소리치며 밝힌 진실이 또 다른 거짓으로 은폐된 나머지 조작이라는 사실이었다. 공정한 수사로 단호히 엄벌하겠다는 공언을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믿으려했고 그나마 전체 사실이 은폐되지 않고 밝혀지게 되어 다행이라는 심정이 대부분이었다. 5명이 2명으로 둔갑한 사실은 모른채…
결국 사건의 진상은「정의구현」이라는 이름그대로 정의구현의 차원에서 밝혀지고 말았다. 그것은 진정한 양심과 용기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다. 두 명과 다섯 명의 차이, 바로 그것이다. 상식선에서 생각한다면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간 엄청난 사건에서 두 명이든 다섯 명이든 범인의 수가 그리 큰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숫자 개념이 비교적 약한 우리 민족은 흔히「두서너명」식으로 셈하기를 즐겨 해왔다. 2명에서 4명을 한 개념으로 묶어 생각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다섯명을 두 명으로 축소 조작하고 사실을 은폐시킨 그 원인에 대해 더욱 궁금할 수 밖에 없다.
우리 국민은 너나할 것 없이 한번 맞을 매를 두 번씩이나 맞고자하는 관계당국의 저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신연령이 부족한 사람들의 짓거리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밥 먹듯이 해온 습관성 거짓말을 상상할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언제까지 국민을 상식선 밖에서 취급하고 다룰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인권이 유린되고 도덕성이 파괴되는 현상이 만연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 조차 없게 타락되어 가고 있다.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의 존엄을 모독한다면, 또 그 모독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삶을 이어갈 절박한 이유를 잃게 된다.
우리는 사제단이 강조한 대로 당국이, 관계자들이, 박군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한 모든 것을 진실 그 자체로 밝히기를 진정 기대한다. 이미 실추된 위신과 상실된 믿음이지만 그래도 한가지의 양심과 도덕성이 남아있다는 희망을 박군사건의 마무리를 통해 국민들 앞에 보여주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만의 하나라도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또다시 전개된다면, 그래서 또 다른 의혹이 국민들을 분노케 한다면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희망과 미래를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 밖에 없음을 명백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더욱 절실한 깨달음은 진실은 누구든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진실을 말하는데 있어 자격이 필요한 우리의 현실, 말하는 사람에 따라 계층에 따라 法 적용이 다르게 돼야하는 우리 현실이 변화되지 않는 한 박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명쾌히 밝혀지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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