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공기와 더불어 스산한 가을바람이 뺨을 때린다. 지금 우리는「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한국의 가을을 살고 있다. 1988년 우리들의 가을은 어느 때보다 화려한 만큼 요란하였고 풍성한 만큼 정신없이 바빴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올림픽 기간 중에 맞이하였던 추석명절은 세계인들의 이목과 관심 속에 더한 감동과 기쁨과 감사의 축제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올림픽 이후 시대를 시작하는 지금 우리들의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고 불안한 것은 웬일인가.
드높은 가을하늘아래 이번 올림픽을 상징하는 오색 풍선과 더불어「세계는 서울로 서울른 세계로」라는 대형 입간판이 유난히 우리들의 눈길을 끈다. 「손에 손잡고」, 화합과 전진의 올림픽, 열전 17일간의 사상 최대ㆍ최고ㆍ최선의 제24회 서울 올림픽이 오늘(2일)잠실벌에서 그 역사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개최국의 직전 대통령과 개최시의 직전시장이 이른바 그들의 비리와 독직문제로 올림픽 식전에 참석할 수 없었던 부끄러움이 남아있고, 또한 여전히 인적 물적 시간적 노역에 비해 올림픽 자체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상존하는 것이기는 해도 역사 속에 사건 속에 시간 속에「88 서울올림픽」은 길이 그 자취를 뚜렷이 남길 것임에 틀림없다.
멀리는 지난7~8년 동안 가까이는 달포동안 가히「올림픽 열병」이라 하리만치 전 국민의 귀와 눈과 입이 모두 성화 봉송과 올림픽으로 집중되어왔다. 모든 희생과 노고와 정성은 우리들의 올림픽을 용케도 잘 치장하여왔고 우리들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역시 철두철미 올림픽에 얽매여 지내왔다고 할 만한 것이 되었다.
오늘 우리는 틀림없이 올림픽을 치러 낸 기쁨과 자랑스러움으로 세계열강과 어깨를 겨루며 당당하게 선진대열에 들어서는 것일까. 참으로 서울올림픽은 우리들에게 무엇이며 또한 우리들의 현재와 장래는 어떻게 진전되어야 하는 것일까 또한 이 시대 이 민족의 구원을 열망하며 진실한 신앙을사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대체 어디서 무슨 생각들을 하며「새 하늘 새 땅」을 밝히려할까.
그 동안 올림픽휴전으로 소강상태에 놓여있던 제5공화국비리문제와 광주사태 문제 등은 대통령신임문제와 관련하여 정국을 다시 초 긴장상태로 몰고 갈 것이라고 한다. 연 44개월째 노상예배만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던 박형규 목사 사건과 80년도 여산본당 사제관 방창신 신부 테러사건 또한 정치문제로 불거질 전망이다.
그리고 한ㆍ미 행정협정 개정문제, 히로시마 원폭 파괴력 1천배로 추측되는 한반도내 핵무기 배치문제, 재야와 야권에서 제기하고 있는 구속자 석방문제, 학생들을 비롯한 사회일각에서 심도 깊게 논의되고 있는 통한 또는 대북한 대화문제, KBS심야토론에서 노정되었던 좌우 이념 논쟁대결 양상과 중앙경제 오홍근 부장 피습사건 등은 계속하여 우리들을 괴롭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돈 받고 교단을 파는 교육계 비리문제, 여성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대우 문제, 해직 언론인 복직문제, 언론계 권력유착 행적문제, 각종 노사문제, 갈수록 심각해지는 주택문제, 올림픽 이후 크게 늘어날 전망인 AIDS 문제 등등 우리가 당장 풀어헤쳐야 할 난제는 수없이 많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일상 가운데 부딪히는 크고 작은 사건과 사연들은 여전히 우리들의 문제가 되어있고 갈수록 흉폭 해 지고 황폐화되어가는 각종범죄행위는 오늘의 우리를 한없이 참담하게 만들어 버린다. 과연 올림픽 이후시대를 새로이 열면서 바랄만 하고 달라질 만한 것이 무엇인가.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지난 19일 기자간담회에서 서민대중과 고아원 양로원 등을 방문한 결과 이들은 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고 심지어 올림픽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말하였다. 참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의 문제는 문제가 문제인 것을 모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나온 세월동안-관계당국은 물론이려니와- 우리의 신문 방송들은 얼마나 많이 올림픽 유산과 올림픽 문화의 창출을 애써 역설하여 왔던가.
이제 더 이상「셰울」일 수 없는 우리의 수도 서울이 자랑스러워야 한다. 두 번 다시 직전 시장과 현직교육감이 구속되는 일이 없어야 하고 비리와 술수와 탄압의 온상이 되지 말아야 하며, 또한 퇴폐문화 외래문화ㆍ이질문화의 중앙 특별시 서울은 청산되어야 한다. 역사상 스물네 번째의 세계 올림픽을 치룬 국제적인 거대도시 서울은 언제까지나 이 나라 이 겨례의 수도 서울로 사랑받고 남아있어야 한다. 행여 서울의 특별시민을 제외한 우리나라 대다수「보통사람」들로부터 경원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서울이 되어버린다면-그래서「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유출되어버리면 큰일이다.
어느 일간지에 소개된 외국인의 이야기처럼「외국인에게는 친절하고 내국인에게는 딱딱할 수밖에」없는 우리의 서울이라면 과연 서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동서현상」으로 일컬어지는 지역감정보도 우리들의 이방지대 서울, -중앙에 빗대어 지방이 아닌 지역민으로 살라가고자 하는 일상의「보통사람」들과 서울의 「특별사람」들로 크게 대별된다면 또 하나의 통일이 새로운 과제가 되지 않을까. 지금 우리 시대 우리들은 지역별 성별 종교별 세대별 직업별 신분별 그리고 빈부차에 따라 천 갈래 만 갈래 파편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Hic et nunc)오늘의 한국교회를 뜨겁게 살아가고자하는 그리스도인의 한숨과 고뇌가 있으며 운명과 책임이 가로놓여 있다.
흔히 세계가톨릭의 올림픽으로 일컬어지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대교구 주관으로 내년 10월, 또 한 번 서울에서 장엄하게 펼쳐질 것이다. 성체대회를 앞두고 지난 수 삼년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교구와 본당에서는 일대 성체조배운동과 더불어 특별한 세월을 살아 왔다.
형제자매여! 짙어가는 1988년 가을에「손에 손잡고」절실한 가슴으로 「성체 안에 하나 되기를」열망하며 공감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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