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에스 오 에스), 이 부호는 선박이나 항공기가 조난을 당했을 경우 긴급구조를 요청하는 무선전신의 통신신호임은 잘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CQD(Come Quick Danger)가 조난신호로 사용됐으나 공중상태가 나빠 잡음이나 혼신이 있을 경우 청취가 어려워 1906년「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국제 무선전신회의 때 SOS로 바꾸었다고 한다.
SOS의 어원(語源)으로는「Save Our Souls」「Save Our Ship」그리고「Suspend Other Service」등이 거론되지만 어느 것이 확신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던 긴급구조를 요청하는 이 부호가 언제부터인가 일반적인 위험구조요청신호로도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 한가지예로 유럽지역에서는 십자가중간에 SOS스티커를 부착한 차량이 사고를 당할 경우 즉시 가톨릭계병원으로 연락해주고 사고자가 천주교사제나 신자의 도움을 받도록 주선해달라는 표식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부호를 사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즉「SOS어린이마을」이다. 현재 대구와 서울과 순천 3개 지역에 이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우리 국민들에게 생소하지 않은 듯싶다.
이「SOS어린이마을」이 금년 9월로 우리나라에 창설 된지 25주년을 맞아 최근 대구마을에서 은경축 행사를 가진바 있다.
이 마을들에는 10~20가구 안팍이 한 개의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각 가정마다 아버지는 없이, 어머니가 가장이되어 자녀들과 함께 오손 도손 살아가고 있다.
이들 가정의 자녀들은 모두가 친부모를 잃었거나 생모가 내버린 기아들로 부모와 가정을 한꺼번에 잃은 가엾은 아이들이다. 이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서부터는 비록 혈연이 아닌, 인위적인 가족이긴 하지만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의 따뜻한 보호와 애정 속에 밝게 자라고 있다.
올해로 마을성립 25주년이 되면서 그동안 이 마을에서 자라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졸업하고 결혼까지 해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중 한사람의 얘기를 옮겨본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마을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집이 좋았다. 내 혈육 보다 더 정이 든 집이고 이제 여기가 내 집이고 고향이며 낯설고 어색했던 아줌마가 포근한 엄마로만 느껴지게 된 것이다 떼어버릴 수 없는 동생들, 각기 다른 성을 가진 우리지만 피보다 더 진한 형제들이 되어있었다. 7년의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85년 5월에 결혼을 했다. 시부모님께서도 친정부모이상으로 잘해 주신다. 마을 집을 사돈댁으로 여기시는 그분들이 고맙기만 하다. 그이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지금은 장모가 있는 처가로 알고 있다.
두 아들을 출산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다. 새들의 지저귐도 꽃들의 아름다움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세계은인들의 고마우신 마음도, 특히 오랜 세월동안 나를 기억해 잊지 않으시는 비어기테 아줌마의 아름다운 마음씨도 마냥 베풀기만 하시는 어머님의 사랑도 알게되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헤르만 그마이너 총재님과 이 프란치스까 할머님, 그리고 7호집 우리들의 어머님께 감사드리며 오늘이 있게끔 지켜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한국 SOS어린이마을이 25주년을 맞기까지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숭고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공로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초대원장을 역임한 하마리아 여사를 비롯 1963년부터 지금까지 일생을 바쳐 헌신해 오고 있는 이 프란치스까 여사, 그리고 마을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니로 살아온 분들과 현재 어머니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이 마을이 대구에 처음 설립되고 꾸준히 성장하도록 지원해준 故서정길 대주교를 비롯한 현 교구장 이문희대주교와 이사진 그리고 모든 직원들의 숨은 헌신과 배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과 못지않게, 아니 이들보다 가장먼저 기억하고 존경을 표해야할 분은 지금은 고인이 된 헤르만 그마이너 총재이다. 왜냐하면 그가 없었던들 한국에는 SOS어린이마을이 설립되지도 못했고 오늘과 같은 발전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6ㆍ25동난 이후 사회가 불안정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고아들이 부모와 보금자리를 잃고 방황하던 1963년 초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불우한 처지를 목격한 그는 이들을 돕기 위해 한국에도 SOS어린이 마을을 설립할 것을 결심하고 하나의 지혜를 짜냈다.
그는 본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면서 한국 쌀 몇 되를 주머니에 담아갔는데 그 쌀 한 톨에 1달러씩으로 교환해주면 한국에 SOS어린이 마을을 세울 수 있다고 친구와 은인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쌀 한 톨에 1달러. 이는 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비싼 쌀값인 동시에 그가 아니고는 생각해 낼 수 없는「아이디어중의 아이디어」였다. 바로 한국의 SOS 어린이 마을이이 쌀 한 톨씩의 정성이 모여 이룩된 것이다. 그의 뛰어난 지혜에 수많은 작은 사랑들이 쌓여 위대한 업적을 낳게 했다.
1919년에 태어나 1986년 타계하기까지 한때는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되려던 꿈도 버리고 일생을 부모와 집 잃은 어린이들을 위해 바친 그는 합리적이며 이상적인 고아의 양육방법을 참안, 이를 전 세계에 전파한 사랑의 사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때마침 한국교회는 10월 16일 한국성체대회와 내년 10월의 제44차 세계성체 대회를 앞두고 한마음 한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운동 속에는 고아들과의 결연과 국내 입양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헌미운동이 포함돼있다. 벽안의 이국인들이 젊음과 생을 바쳐 이역만리 이 땅에서 보여준 모범을 이제는 우리가 실천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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