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잠을 깨우는 이 도미나씨의 전화. 가을이 끝나기 전에 양평으로 내려와 차 한 잔 나누자는 이야기다. 스산하게 유리문을 통해 비쳐드는 단풍진 벚나무를 바라보며 양평으로 가겠다고 대답을 했다. 서리를 맞은 듯 군데군데 물이든 벚나무 잎새. 어느 해 가을이던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지독히도 강렬한 집착과 애정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리하여 실망과 허무감이 곱으로 불어났을 때 도미나는 나에게 떠나기를 명했었다. 나는 그때 모든 것으로 부터 떠나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그녀는 내게「절실하지 않기 때문에」떠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나는 오랫동안「사랑, 명예, 부(富)」에 대해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만을 감지하려 애썼고 또한 그런 것들의 속절없음을 뼛속 깊이 간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도시 끊어지지 않는 헛된 욕망. 달콤하고 끈덕진 애무처럼 환상 속에 도취하게 만드는 세상적인 것의 유혹. 나는 드디어 인생의 한 장을 포기한다기보다는 일단 덮어두는 것으로 하고 짐을 꾸렸다. 부랴부랴 쫓기듯 배편을 이용해「오오사카」로 갔다. 거대한 여객선에 의해 가차 없이 부서지는 얼음 조각 같은 흰 물결, 여객선의 갑판에 서서 그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진초록의 바다에 뛰어들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 때문에 손목이 으스러지도록 난간을 꼭잡아야만했다.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영원한 것 또한 무엇이길래 이리도 인간들이 많은 갈등과 방황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느님을 안다는 것, 하느님을 알았다는 것이 방황과 고통의 요체이며 또한 자기극복의 정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절실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하느님을 찾는다. 그러나 나는 그 절실한 때에 그를 잠시 떠나기로 했다. 나는 그만큼 항상 하느님과 대적하려했으나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었던가.
사막에 내던져진 어린 들짐승처럼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국의 거리에서 무작정 헤매며 태초의 이브와 같은 상태가 되어보려 애썼다. 아무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나 또한 그들을 모르니 정말 에덴동산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게 입혀졌던 모든 옷들이-어머니, 아내, 여성- 모두 벗겨지고 피안으로 날아갈 수 있을 듯한 상태였다. 나는 비로소 내가 짐스럽게 여기고 있던 실체를 파악했던 것이다. 한 여성으로서 짊어져야 했던 한국적인 관습, 그것을 잠시나마 벗어버리고자 얼마나 발버둥 쳤던가.
많은 작가들의 작품 배경이 되었던 아다미(熱海) 해변가에선 아무런 근심도 없이 먼 바다까지 헤엄쳐갔다. 2km는 됨직한 거리에 띄워놓은 평상과 같이 평평한 나무 바닥에 숨을 몰아쉬며 기어올라 축늘어져 버렸던 조그만 몸둥이, 거침없이 쏟아 붙던 뙤약볕. 그때 난 얼마나 큰 양의 가식이 그때까지 우리들을 겹겹이 싸고 있었던가하는 것도 깨달았다. 끝없이 영원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씌워진 가식이라는 굴레. 언제쯤이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게 되는 것일까?
서둘러 양평으로 내려가도 미나씨와 함께 차를 나누어야겠다. 그녀와 나의 절실한 향수를 달래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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