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녁기도를 꼭 하고 잔다. 만약 어떤 이유로 못하게 되었다면 다음날 아침에라도 저녁기도를 한다. 그리고 아침에는 아침기도를 외지 못하기 때문에 묵주기도를 학교에 도착 때까지 버스 안에서나 길을 걸으며 한다. 그러나 누가 보고 이상히 여길까봐 성호를 엉망으로 긋는다. 머리를 어루만지듯 하다가 다시 양쪽 어깨를 차례대로 건드리고 손을 비빈다. 부끄럽지만 이렇게 성호를 했던 것이다. 내가 천주교나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누가 묻더라도 천주교신자이고 주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호를 잘 긋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학교에서의 점심시간때도 식사 전 기도를 아이들이 적은 곳으로 가서 성호를 엉망으로 하고 기도드린다. 집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어떤 때는 죄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되뇌지만 손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전히 성호를 대강 긋고 있을 때의 하교때였다. 버스 속에서 회색 수녀복을 입으신 수녀님을 보았다. 친근감이 들고 반가왔다. 수녀님은 곧 좌석에 앉으실 수 있었다. 수녀님께서는 앉으시더니 성호를 자연스럽게 그으셨다. 주위의 눈은 어떻든 말이다. 그 순간 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성호를 그을 때보다 더 부끄러움을 느꼈다.
수녀님께서는 주님을 지극히 따르는가 보다.
이 일 후에 나는 버스 속에서나 친구들 앞에서도 떳떳이 성호를 그을 수 있게 되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