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마침내「민주화의 계절」이 찾아왔다고 한다. 세계각국의 언론들도 한국은 경제적으로 기적을 이룬 신흥유력국가인데 이제 정치적으로도 민주화의 기적을 낳고 있다고 입을 모아 찬사를 보내고 있다.
과연 이땅에 민주화의 날은 오고 있는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말 해왔던가『밤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않았다』고. 『민주화의 봄은 오고야 말 것』이라고.
그러나 저 1980년 여름의 민주화 차질과 더불어 오히려 광주사태라는 악몽을 겪으면서 실상 우리 국민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희망없는 나날의 삶을 영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암담한 세월속에서 그래도 우리에게 한가닥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주곤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오늘날 우리 겨레의 추앙받은 지도자가 되어있는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멀리는 1971년 성탄 전야 보위법 비판에서부터, 가깝게는 재작년의 이른바「학원 안정법」반대에서부터, 부천서 권양의 성고문에 대한 준열한 단죄, 6·29직전 청와대 면담에서의 직선제 개헌 권고 등을 돌이켜 보자.
그때마다 우리 사회의 그 누구도 그러한 문제들에 감히 한마디 말을 못할때 다만 김수환 추기경이 양심과 국민 화해와 진정한 해결을 향한 물길을 트곤하였다. 그리하여 정계 여야의 모든 정상급 유력인사들도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으례 추기경을 찾아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한편 윤공희 대주교도 이해 봄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정평위 시국기도회에서 제5공화국 정권의 정통성 부재를 심각하게 지적하였다.
이와 아울러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도 민주화 추진에 커다란한 몫을 하였다. 특히 서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 조작발표에 대한 김승훈 신부의 폭로성명이야말로 온 국민의 의분을 한껏 격발시켰다. 독재 치하의 오랜 세월 동안 수사 당국의 밀실취조가 이러저러한 고문을 했다든가, 어떤 천인공노할 사건이 있었다든가 하는 풍문만이 사회뒷골목에 떠돌 뿐 국민은 그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김승훈 신부의 폭로 성명이 있자 경찰 당국은 고문치사 내용의 조작 발표사실을 별 수 없이 자인하고 범인 확대 조치에 들어갔다. 바로 이때부터 사회 분위기는 도저히 이 정권을 이대로 더 묵인할 수는 없다는 결의를 다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서 6·10민주헌법쟁취 법국민대회에서 젊은이들이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와 농성에 들어갔을때 역시 가톨릭교회는 이 사회의 그 어떤 조직도 수행할수 없는 문제해 결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교회가 끝까지 젊은이들을 보호한다는 자세였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은 오늘 이명동성당 농성에서 결판이 날수있는것이 아니니 일단 무사히 귀가한후 계속 투쟁하자는 것, 교회는 여러 젊은이들보다 더 앞장서서 민주화 대열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말하고 교회는 마침내 경찰 봉쇄망을 철수시키기에 성공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무사히 가정과 학교로 돌아갔다. 이 농성해산을 두고 민주화 전략과정에서 과연 성공한 것이냐 실패한 것이냐에 대한 약간의 이론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농성의 고난 그 자체도 아니고 증오에 찬 대결의 지속 그자체도 아니다. 더우기 경찰병력이 진입해 성당안의 학생과 시민들을 치고때리면서 연행해다가 구속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일 수는 없다.
물리적 폭력을 실제로 몸에 당해 본 사람들은 오히려 그 인간 존엄의 유린과 참기 어려운 모멸의 아픔을 아는것이다. 그러한 불행을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는 해소시키면서 일을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죄의 기회를 줄여 나가는 교회가 취하는 일의 방식이다. 그리하여 명동 농성의 해산은 학생과 교회와 경찰이 모두 승리한 특수한 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부터 정부와 경찰은 처음으로 철수와 후퇴의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데에 또 하나의 의미가 있었다.
민정당 노태우 대표의 6·29직선제 민주화 개헌선언은 실로 온 국민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와 같은 전환 국면을 가리켜 많은 이들이 말하기를 지금 집권 여당으로서는 그 길 밖에 자구책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된 점도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이나 집단이 잘못된 과거를 허심탄회하게 반성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독재 정권의 말기가 그와 같은 자발적 민주화로 전환한 예는 세계 정치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특히 교회의 입장은 용서와 화해를 지향하며, 오류와 오류를 범한 인간을 구별해서 생각한다. 오류를 범한 인간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의 주목 속에 있는 한국의 민주화 추진은 오히려 앞으로 더 조심해서 노력해 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다.
첫째로 여권은 유신 독재 시대 이래 정치적 소신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모든 양심범을 남김없이 석방하고 또한 수배중에 있는 이들에겐 역시 남김없이 수배 해제조치를 취해야 한다. 둘째로 야권민주세력 쪽에서는 들뜬 공명심의 노출을 삼가고 특히 제파별 파쟁을 삼가야한다. 셋째로 학생 및 근로자 등 젊은 세대는 현실적으로 전략적 거점이나 대안이 없는채로「보수반동」이니「개량주의」니 하며 기성세대와 단절하는 급진주의적 편협성을 버려야한다. 이 세가지 난제마저 끝까지 극복함으로써 실로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날을 확보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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