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감사드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들 가운데는 고향도 포함된다. 가끔씩 눈을 감으면 고향은 어른거리는 고추잠자리, 초가 지붕위의 보름달, 시냇물과 가재잡기, 얼음지치기는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편안함과 그리움으로 내게 다가온다.
내게 있어서 신학교는 또 하나의 고향인 셈이다. 산책길, 밤나무 숲, 성당과 강의실, 도서관, 하늘, 그리고 운동장은 가장 좋았던 식당과 공동 침실과 더불어 가장 젊은 날에 가장 젊은 꿈을 불태웠던 손때와 체취가 있는 곳이기에 그렇다. 사목 생활 중 어려움과 무능함, 그리고 나약함 앞에 절망할 때 떠오르는 신학교의 모습은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주는 고향의 품속과도 같다.
사제 피정에 교구의 신부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평생을 사제직에 투신했던 은퇴 신부님과 나에게 삶으로써 귀한 모범과 자긍심을 주신 여러 선배 신부님들…. 함께 모여 같이 기도하고 미사 드리고, 또 강의와 대화를 나누니 꼭 신학교에 온 것 같고 고향에 온 것 같다.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 자유 시간에 비록 서로 그런 말은 안 해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음을 가슴으로 느낀다. 허물 많고 죄 많은 그리고 약점 투성이의 신출내기 사제이지만, 다시 한 번 성직자 묘지에 묻힐 그 날까지 사제로서 잘 살 수 있게 해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린다. 작년 이 맘 때에는 같이 계셨지만 지금은 하느님 나라에 쉬고 계신 이 신부님, 김재덕 주교님 등 선배 사제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우리들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일치시킨다.
조락의 계절인 가을에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이 곳 천호 성지에서의 피정에 나는 또 하나의 고향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실 교우들을 생각하면서, 이 좋은 시간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사제들끼리의 우정과 친 형제와 같은 일치를 느끼며, 어느새 나는 이 새로운 고향의 따뜻한 품속을 헤매 인다.
『오, 얼마나 좋은가, 형제들이 한데모여 오손 도손 사는 것』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