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목사인 H형에게
十그리스도의 평화
H형!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톨릭교회의 사제가 된 제가 만 20년이 지나서야 개신교 천만신자의 목사가 된 형에게 느닷없이 붓을 든 심경을 헤아릴 수 있겠소. 웬일인지 지난 70년대 유신시절에 소위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까지 당하셨던 형이 갑자기 생각나는구려.
또한 대학시절「철학자는 미남(美男)이라야 한다」던 은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미남이란 외양을 일컬어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인품과 학문이 얼굴에 드러날 때 미남일수 밖에 없다는 뜻이지요. 또「인간이라고 말할 때 간(間)에 강조가 있다」던 철학자 이재훈님의 말씀도 기억납니다. 인간이란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기도 하겠습니다.
H형! 도심의 거리마다 수북이 쌓이는 낙엽들을 바라보면서 새삼 인생무상을 노래한다면 지나친 심상이요 감상이라 할 뿐이요. 가톨릭교회는 이달11{}나가신 분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교회묘지를 찾아가면「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글귀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무덤속의 고인이「오늘은 나에게 죽임이 왔지만 내일은 너에게 죽음이 온다」는 경구적인 가르침을 묵상에게 해줍니다.
H형! 이제는 아침 저격으로 제법 쌀쌀한 기온이 초겨울 문턱에 들어선 듯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요즈음 세상은 날씨보다 훨씬 더 을씨년스럽고 차가우며 답답한 시대상(時代相)을 보이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지난 7ㆍ8ㆍ9일 연 3일간 계속되었던 국회 5공비리 청문회는 우리나라 의정사상 초유의 일로서 전 국민적인 관심과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켰었지요.
한국 갤럽연구소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전 국민의 83%가 TV를 시청하였는데 질문의원들의 자질부족이 66%, 증인들의 답변이 솔직하지 못했다는 응답이 80%였다고 합니다. 밤잠을 미루며 새벽 3시가 넘도록 장세동ㆍ안현태ㆍ최순달ㆍ양정모 정주영 등 증인들의 증언을 청취하면서 참으로 절실한 가슴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역사를 또 한 번 떠올려 보았습니다.
국회는 계속하여 18ㆍ19일 광주사태 21일 이후에도 언론관계 청문회를 TV생중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 TV가 참으로 고맙게 여겨집니다.
TV는 우리시대와 역사의 큰물줄기를 이룰 인물들의 얼굴과 삶과 정신을 그대로 심도 깊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시대를 크게 주름잡았던 이름난 이들,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자랑하는 이른바 대한민국 최상류층 인사 1백명 가까운 이들과 질의하는 국회의원들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공연히 자괴와 비감에 잠기게 되는 것은 웬일입니까. 또한「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옛 말을 자꾸만 생각해 봅니다.
H형! 형은 대학시절 유난히 우리나라 역사와 철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요.
유사 이래 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나갔습니까. 사람들의 얼굴 모습이 저마다 서로 다른 것처럼 사람들마다 살고 죽는 양상 또한 천태만상이라 할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는 그만두고라도 우리 역사를 보면 순교자와 충신ㆍ열사가 있고 반대로 배교자와 역적ㆍ매국노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정의롭고 슬기로우며 힘차게 살아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불의하고 우둔하며 철새처럼 지조 없이 무용하게 살아가는 이가 있습니다.
언뜻 4불가론을 내세우며 위화도 회군을 강행하였던 이성계가 생각납니다. 계유정란 때 단종임금과 동료들을 배신하고 수양대군편에 가담하였던 김질신숙주 등이 또한 생각납니다. 유자광, 이이첨 등이 생각나고 한말 이완용 등 을사오적이 다시 한 번 원망스럽습니다. 그런가 하면 황금을「돌같이 보았다」는 고려 말 충신 최영 장군과 성삼문 등 사육신, 그리고 인조 때 청나라에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윤집ㆍ오달제ㆍ홍익한 등의 3학사와 한말 민영환ㆍ최익현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흠모해 봅니다.
H형! 우리나라 역사에 크고 작은 이름을 남긴 이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청문회를 열어본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우선 두 부류의 사람들로 크게 대별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수십 수백억 돈을 모으고 갖은 보약을 먹으며 권력을 남용하고 비리를 서슴지 않다가, 돈도 권력도 생명도 만족하게 누리지 못하며 한(恨) 만을 품고 이 세상을 떠나간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온갖 수모와 천대와 오욕 가운데 지상생애를 마친 듯 보여 졌지만 그 삶과 정신과 이름이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H형! 우리가 대학을 다닐 때도 4대의혹사건 등 온갖 부조리가 있었으며 한일협정 반대데모 위수령, 대학 휴업령 등 연일 학원과 사회가 소란하였지요. 그런데 20년이 지나서도 여전한 데모, 여전한 불신과 부정과 불안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음은 또한 어떻게 된 일입니까. 틀림없이 지금 우리는 다 같이 시대와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H형! 이번 국회 청문회는 흘러간 한 시대 주역들을 비리와 인품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불운과 비극은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앉아있지 말았어야 할 인물들이 엉뚱하게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개신교 목사로 사시는 H형! 지금 여기서 형은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며 어떻게 지내십니까. 70년대의 투옥사실이 자랑스럽습니까, 부끄럽습니까.
H형! 이 시대와 우리의 역사는 오늘의 그리스도 신앙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개신교 목사인 형과 가톨릭의 사제인 저를「자유와 정의와 진리」의 청문회장에 세우며 선서와 증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오늘의 사제와 목사는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보통 사람이 아닌 특별한 신분으로 특별한 대답을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형과 나는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며 언제까지나「미남」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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