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읽고서도『아, 청문회 얘기로구먼』이라고 지레짐작하겠지만 우선은 이 글자체가 동문서답일 것이라는 걱정부터 털어 놓아야 되겠다.「방주의 창」이란 칼럼은 아무래도 논단인 셈이고 나는 그런 글을 쓸 자신이 없으니 이글은 결국 신문사나 독자들에게 하나의「동문서답」이 될 것 같다.
예수님의 동문서답.
나는 복음서에도 동문서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세금 논쟁」(마르 12, 13-17병행)을 보자. 이건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와 나눈 동문서답이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바쳐야 하는가? 바치지 말아야 하는가?』
『(데나리온 한 닢을 보이며)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카이사르의 것이다』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도대체 세금을 바치란 말인가? 바치지 말란 말인가? 카이사르의 것은 무엇이고 하느님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님의 대답에서 나는 아무것도 알아낼 재간이 없다. 성서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구구각색으로 해석하는 모양인데 나는 다만「예수의 말씀을 트집 잡아 올가미를 씌우려한」(13절) 그들의 함정을 멋지게 빠져 달아나신 예수님께 박수를 칠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이 동문서답으로, 예수를 대단한 정치적 지도자로 모시려는 군중의 함정에서도 교묘히 빠져나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지난주 그리스도왕 대축일 미사복음(요한18, 33-37)에서도 우리는 또 하나의 동문서답을 발견하게 된다. 빌라도와 예수님사이에 오간 동문서답이다.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그것은 네 말이냐? 아니면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들려 준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
『내가 유다인인 줄로 아느냐? 너를 내게 넘겨 준 자들은 너희 동족과 대사제들인데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 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아무튼 네가 왕이냐?』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왔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말을 귀담아 듣는다』
『진리가 무엇인가?』
도대체 예수님은 자신을 왕이라고 하시는가? 왕이 아니라고 하시는가? 왕이 아니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는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왕,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왕이기를 완강히 거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五共」의 동문서답.
청문회, 「광주」청문회 그리고「언론」청문회에서 우리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완」을 만들어 냈고 그「앙」이 어떻게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었는지를 들었다. 물론 증인들로부터 들었다기보다 신문하는 국회의원들로부터 더 많이 들었다. 지금까지 불행을 한반도의 땅덩이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느끼고 있다.
국회의원들 편에 서서 동문서답하는 증인들을 혹독하게 몰아 부치거나, 증인들을 동정하여 국회의원들의 짜증스런 신문을 힐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증인들 앞에서 증거들을 제시하며 격양된 어조로 호통을 치는 국회의원들을 보면서, 유리한 고지를 고수하거나 불리한 입장에서 벗어나려는 각 당의 전략들을 보면서 이를 하나의 해프닝으로 부담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정국이 바르게 풀리기를 걱정되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정계에서나 언론계에서, 그리고 재야세력에서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나는 6공화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 몸서리쳐지는 일이 다시 되풀이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흉악한 일들이, 저 원한 가득한 일들이 누구의 소행이었던지 분명히 밝혀져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다짐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너와 나」의 동문서답
『나는 아니다. 나는 모른다 나의 일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는 증인들에게 신랄하게 묻는 국회의원들의 질문에서『나는 아니었다 나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나의「들을 귀」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일까?
과연 그들은 가해자요 우리는 피해자일 뿐일까? 그렇다면 그들만 회심하면 우리들의 노력과 쇄신 없이도 새 하늘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을 때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때 교회는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렇게 자문자답해 보면 우리가 해야 했던 일이,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해야 할일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거짓과 죄에 대해 분명하게『아니오!』라고 말하는 일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느 누구도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하고 우리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민주」의 나라를 지켜나가는 일이 우리가 할일인 것이다. 그렇게 해야 만이 우리도 우리의 잘못을 속죄하게 되고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들과 우리가 하나가되어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떳떳이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집필해주신 신달자ㆍ이규정 교수ㆍ윤여덕 교수ㆍ최홍길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호부터는 정승현 신부, 박복주 수녀, 정요 교수, 안문기 신부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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