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교구 1900년대 초창기부터 1946년까지 근 반세기 동안을 조선 교구에 속해 활발한 전교 사업을 이룩했던 곳이다.
지금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되어있고 1946년 이후는 교황청에 의하여 중국 심양(옛 봉천)교구로 되었다.
1945년 말기와 46년 초에 이미 모든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외국인(주로독일)성직자들은 본국으로 추방당하고 한국인 신부 수녀들은 박해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 한국에 들어왔다. 그 후 1958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시기에는 신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내어 체형을 가하거나 지방으로 추방하였으며 1916년에 세워진 고색창연한 고딕식 팔도구 성당을 헐어버리고 성당묘지에 세워진 성직자 비석을 잘라 뭉개버렸으며 심지어 성직자의 시신을 파내 강물에 뿌려버리는 극악한 사태로까지 번졌다. 각본당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도처의 교회말살정책에 모든 신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갔다. 1968년 문혁이 끝난 후 애국교회(천주교)가 생겼으며 그 간판아래서 늙은이들이 가정집에 모여서 주일판공을 보는 정도로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고 해가 지날수록 교회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노인중심의 교세회복이 이루어졌다.
필자가 방문한 1986년은 성당이 없어진지 꼭 40년째 되는 해로 연길성당(대지300평 건물100평)이 새로 건립되어 8월15일 성모승천축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이때 참석신자 400명) 한달 후 9월14일 길림교구 주교(중국인 李요왕)의 집전으로 성대한(각지에서 600명 참석)축성식을 올리면서 새로운 회복기에 들어섰다.
그년 여름에는 훈춘(琿春)에도 새 성당이 세워지면서 비공식 통계로 연길지방 교우 수는 3천명을 넘게 되었다.
한때(1936년)본당19곳 공수 1백여개소 교우2만명에 가깝던 연길교구는 오늘날 교황청과의 관계를 뿌리치고 독자적 애국교회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내년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교황청과 관계개선이 있으리라는 희망적 기대를 안고 연길교구를 뒤돌아보는 것은 근간 국력이 신장되고 올림픽을 치룬 우리의 국제적 지위를 가늠하는 한편 중국으로서는 국내외의 개방정책과 자유무역 상업주의가 대두되어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연길교구를 재검토해 보는 것은 대단히 시기적절한 과제이다. 또 평화통일의 갈망이 솟아오른 이때에 통일의 앞날을 위하는 큰징검다리 역할에도 기대가 걸어진다.
팔지는 연길교구가 탄생한 다음해에 그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많은 풍랑과 대소사건을 당했다. 특히 일제의 학정, 독립군의 무장투쟁, 애국지사들의 활동무대 속에서 신앙생활 종교교육 가족생활(증조, 조부모, 부모 모두 신자)을 통하면서 교회에 파묻히다시피 살아오다가 해방된 2년 후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중공군에 끌려나가 군인으로 연길방송국에 근무하였다. 중공군이 전국토를 석권하려 들던 1948년10월 더 이상 이 고장에 머물고 있으면 빠져나갈 수가 없음을 판단하고, 믿음과 자유 고향과 조국을 그리면서 야반을 틈타 단신으로 두만강을 건너 평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나름대로 용감한 처신이라 자부하였으나 3대독자인 가족관계로 보아서는 불효자의 위치에서 38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연길지방을 찾아 갔을 때 윗조상 한분의 묘혈도 찾지 못하는 비애를 맛보면서도 찬란하였던 옛 연길교구의 새싹이 다시 용솟음쳐 피어오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연길교구는 잠시 쉬었고 동면(冬眠)을 거쳤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에 팔자는(一)연길교구의 초창기, (二)교구전성기, (三)박해기, (四)문혁후의 부흥기 네 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해 보겠다.
(一)) 연기교구 초창기
연길교구가 간도지방에 위치 하다 보니 한때는 간도교구로도 통하였다.
간도(間島)에 대하여 풀이해 보면 압록강 건너편을 서(西)간도라 하고 두만강 건너편을 북(北)간도라 하였다.
일설에는 중국말 간토(墾土)의 사투리로 적혀있다. 만주 시대에는 연길 안도 왕청 화룡 훈춘의 5개현(縣)을 강도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전설로는 사잇(間)섬(島)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압록강은 수량이 많아 맨몸으로 건너기 힘들지만 두만강은 하류쪽이라고 장마철 외에는 수심이 얕아 쉽게 건너갈 수가 있다. 더구나 군데군데 강물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곳에 사잇섬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곳은 채소정도 심을 수 있으나 거의 무용지물이다. 그런데 이 섬을 국경으로 따지면 어느 나라의 독점물이 될 수 없는 것이 통례다. 19세기후반 청나라말기 조정에서는 국경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도강금지의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인적이 드물고 비옥한 땅을 강 건너 눈앞에 두고 바라볼 수만은 없는 당신의 핍박한 생활환경이었기에 이 지방 사람들은 아침 일찍 건너가 씨뿌리고 다듬다가 저녁이면 되돌아오곤 하였다.
이때 누가 뭐라고 따지면 사잇섬 갔다 온다는 변명으로 모든 일이 묵인 되어졌다.
이러한 사연이 연장 반복되면서 간도땅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 후에는 한반도전역에서 북간도로 향하는 민족의 대이동이 이루어진다.
1940년대에는 만주전역의 동포수는 3백50만~4백만명을 헤아리는 제2의 한국이 되어버렸다.(이대 간도의 한국과중국인의 인구비율을7:3)이에 발맞춰 많은 본당과 부속단체가 세워지고 더 많은 공소가 세워지면서 천주교회는 신앙의 표본이기 전에 동포애의 표출현상이 되고 민족정기를 함양하였고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갈망 고취시켰으며 일본군과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중요한 근거지로 되어졌다. 이러한 모든 정신적 근본은 바로 천주교의 신앙심이 근간(根幹)을 이루어 놓고 있었다.
이처럼 역사적 지형적 고찰로 돌아보면 옛날 고구려 땅을 따지기 전에 북간도는 백의민족에게 깊고 필요한 삶터였다.
이러한 무대 위에 혜성같이 나타난 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이기(金以器)라는 동학당출신 석학(碩學)이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학들이 천진암에 모여서 춘주실학을 공부하였듯이 이분도 주님의 진리를 터득하고 제자들을 키웠으며 몸소 세례를 받으러 원산성당(제일 가까운 성당)을 향한 것이 1895년이었다. 두만강건너 회령(會寧)에 이르자 관헌에게 잡혀 동학당으로 밝혀져 감옥에서 옥사하게 이른다. 이때 수제자인 김영렬(金英烈)에게 춘주교 진리를 유언으로 남기니 그는 원산본당을 찾아가 세례를 받고 돌아오니 김영렬 요한은 북간도당의 첫 교우가 되어졌다.
그는 다시 김이기의 제자였던 동료12명을 데리고 또다시 원산성당을 찾아 세계를 받으니 그때가 1897년(서울 명동성당 낙성시기)이었다.
이들12명은 온힘을 다하여 전교에 전력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이들 12명은 북간도 12사도로 통칭되었다.
이처럼 연길교구는 한국초창기 교회사와 똑같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주님의 사도가 되어 모이고 모여서 찬란한 연길교구를 만드는 초창기의 일꾼이 되고 밑거름이 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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