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교구의 내력을 보면 1784년 이승훈의 첫세례로부터 47년간을 성직자 없이 중국북경교구에 속해 있다가 1831년에야 조선교구(대목구)로 창설된다. 그러나 1846ㆍ1866년의 병오ㆍ병인 대박해를 거쳐 1880년에 와서 선교의 자유가 얻어지고 1911년에 이르러 서울과 대구의 두 대목구로 갈라져 사목하게 된다. 이때 서울교구는 충청도 이북의 광활한 지역이었기에 교구장 뮈델(閔) 주교의 요청으로 독일 오릴리엔 베네딕도회의 사우어(辛)수사 신부 등 2명이 혜화동에 수도원을 개설하고 사목하다가 1920년에 이르러 원산교구로 분할하여 함남북과 북간도지역을 관할하여 신 신부는 주로 교구장이 된다. 1922년 원산교구 통계에 의하면 신부(독일)14명, 수사 12명(한국인3) 신자수는 7천5백명 본당이 다섯인데 그중 원산과 내편(內坪)만 함경도에 있고 나머지 셋(용정, 삼원봉, 팔도구)은 북간도에 있었다.
해마다 본당이 늘어 1922년 연길, 23년에 육도포, 24년에 훈춘, 26년에 다조구(대련동), 같은 해에 돈화, 도합8개의 본당이 있던 1928년도에 원산에서 분리하여 연길교구(지목구)가 되고 스위스인 브레허(白化東) 백 신부가 교구장이 된다. 이때 교우 수는 1만명이 이른다. 이리하여 이국땅이나마 조선교교회 다섯 번째 교구로 탄생하니 꼭 60년 전 일이다.
이때는 동북아시아, 특히 만주대륙에 거친 군사세력이 불어올 때다. 러시아와 일본이 호시탐탐 하는 속에서 일본은 독립애국투사들이 근거지로 활동하는 것을 구실로 이미 용정에 영사관을 차려놓고 애국지사들을 체포, 처형하는 속에서 연길교구가 탄생한 것은 국토를 빼앗긴 민족으로서 가까운 이웃에 교두보(橋頭堡)를 얻은것같고, 민족적 지위(地位)가 확보 된듯하여 교우뿐만 아니고 모든 동포들이 기뻐하니 축하 하였다. 곧이어 1930년에 주교좌 건물과 대성당 수도원건립에 들어가 1932년도에 완공을 보며 1931년도에는 스위스의 올리베따노 베네딕도 수녀회가 진출하여 연길에 본원을 설치하고 각 본당에 분원을 두며 병원과 진료소 시약소등을 개설하여 의료봉사에 들어가고, 또 한편에는 본당마다 해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도 힘쓰니 연길교구는 지목구가 되는 1928년부터 해방될 때 까지를 전성기로 보아 마땅할 것이다.
여기에 특기할 것은 1931년도 일본은 만주를 송두리째 삼키고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우면서 정치ㆍ군사ㆍ경제ㆍ문화의 모든 실권을 뒤에서 조정 행사하였으나 이와는 무관한 듯 해마다 교회와 공소 학교와 병원시약소등이 늘어나는 교세의 대약진(大躍進)을 이룬다. 1928년도 조선교구 교세는 전체교우 수는 9만명이고 본당은 84곳인 것과 비교해보면 연길교구는 교우, 본당에서 10퍼센트를 웃돌고 있는 연길이 대목구로 되는 1937년도의 전체교세의 비율도 이에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북간도 지방은 천주교일색이라는 말 그대로였다(이때 개신교수는 천주교의 3~5분의1정도)
이처럼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 치하였지만 신앙생활을 통하여 정신적 안정을 기할 수 있었으며 옛날 모세가 40년간 광야를 헤매면서 이스라엘 본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였듯이 북간도 땅에서 하루바삐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바라는 굳은 신념에 불타면서 민족과 조국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고 소망을 천주님께 읊조리고 탄원하였던 것이다.
이때 관에 몸담거나 군경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를 괴롭혔던 극소수의 민족 반연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동포들은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소원과 갈망에는 이심전심으로 일심동체가 되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해마다 고국에서 찾아오는 가극단과 가수들(백년설 이난영 등)이 찾아와 공연이 있을 때면 극장이 터져 나갈듯 사람이 모이고 연극을 통하여, 노래(지금의 흘러간 노래)를 통하여 국토를 빼앗기고 남의나라 땅에서 사는 설움을 달래기에 많은 눈물을 쏟기도 하였다.
유행가만이 아니고 건전한 가요들도 이때에 생겨났다. 작곡가 조두남이 지은 용정의 노래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일송정 푸른솔은…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조국을 찾겠노라…맹세하던 선구자』선구자의 제목으로 바뀌어 이 나라 모든 청소년들과 어른들까지 가장 즐겨 부르는 가곡이 되었음을 볼 때 북간도에서 이어진 민족의 얼(魂)이 꺼지지 않고 되살아나 오늘이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이-지난날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달래주고 위로를 받고 있다.
1928년 횟수로 헤아려 꼭10년이 되는 1937년에 이르러 연길교구는 대목구(敎皇{}代理監牧區)로 승격하여 브레허 백 신부는 주교로 서성되면서 연길교구는 승승장구의 성장을 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일본이 만주대륙을 삼키고도 모자라 중국대륙마저 삼키려고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해였으나 신앙과 교육문화사업을 통하여 민족적 단합심이 더 왕성해지면서 동포수가 늘어가는 비례로 신자수도 늘어갔다. 더욱 특기할일은 1932년 용정본당에 5대주임으로 부임한 아펠만 배 신부의 각별한 성과를 들 수 있다. 배 신부는 신사형 용모와 학식음악 운동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재간을 소유하고 있었다. 본당신부가 되면서 탈시시오회라는 소년단체를 창설하고 탈시시오회가와 탈시시오 회지(會誌)를 펴냈는데, 이것은 후일 가톨릭 소년이라는(한국초창기)소년소녀를 위한 월간지로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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