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시오회와 가톨릭소년
탈시시오회는 1930년 용정본당4년 주임 랍(朴) 신부 때 생겼고 이듬해 대령동(다조구)본당에서 1차 본당연합대회 때 아펠만(裏) 신부가 대회장이 되었었다. 1932년에 배 신부가 용정5대주임으로 부임하면서 각본당으로 조직을 확대시켰고 탈시시오회 깃발을 만들고 회노래를 작사 작곡하며 회지를 창간하여 이를 보급시키면서 소년들에게(소녀들에게는 데레사회를 별도 만들었다)신앙심을 북돋우었고 문학상식 과학지식을 넓혀주는 활발한 역할을 하였다.
이 탈시시오 회원이란 지금의 보이스카웃과 비슷하지만 제복은 없이 주로 복사대에 종사하는 학생들이 주종을 이루었으나 품행이 단정하고 공부 잘하는 신자학생이면 준회원으로 받아 들여졌다. 1934년도 교구연합대회에서 탈시시오회지는「가톨릭소년」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월간잡지로서의 구색을 더욱 다지게 된다. 내용으로 교회사 서양사 교리해설 과학기술 등 기초교양분야에 동화 동시소설 사화 일화 만화 웃음 이야기 등등 다양한 난(欄)을 추가한 완전한 잡지였다.
여기 발행인에 아펠만, 배 신부 주필에 김구정 편집인은 황덕영 고문에는 부주교인 구 신부 하프너-한 신부 평론가인 서상렬 김환태 화가 구본웅 가나도신문사의 김원제 은진중학 김기태 광명중학 장내원등 쟁쟁한 편집팀으로 발행하니 이 잡지를 가리켜「조선소년들을 위한 월간지의 왕자」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1938년에 이르자 이것을 못마땅하게 보아온 일본관헌들은 불란서를 매체(媒體)로 하여「빛」이라는 새잡지를 만들어 조선교구전지역에 무료로 배포 하게 되면서「가톨릭소년」은재정적 압박을 당하게 되며1940년 와서는 일제의 선전물(글ㆍ사진)을 싣도록 강요하는 바람에 자진 폐간해 버렸다. 이때는 일본에 한글과 말까지 없어려 했고 성(姓)마저 일본 성으로 바꾸도록 강요하는 발악적 시기였으니 어떤 수를 사용하든지 잡지하나 없애는 일은「식은 죽 먹기」로 회상된다.
이로부터 20년이 지난1960년 초 서울교구에 의하여 새로「가톨릭소년」이 발행되고 1972년에「소년」으로 개명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을 옛날의 연속으로 평가하고 위로받고 싶다. 1933년에 조선교구장 회의에서 결정하여 발행한「가톨릭청년」잡지와 성인용「경향잡지」와 함께 3대(大)월간지의 하나로 발행한 당시의「가톨릭소년」지는 타 잡지에 비해 발행부수 규모 등에 뒤졌지만 연길교구 단독으로 발행한 점을 돌이켜보면 장하고 훌륭한 일로 기록되고 기억해야 할 일이다. 1939년 배 신부는 용정에서 연길상시(웃개방지)본당으로 부임한다. 1940년 필자는 연길로 이사하여 해성학교 4학년에 편입되고 탈시시오회 복사대 성가대에 봉사하면서 배신부의 강인한 실체를 보게 된다. 그것은 여타학교에서는 1940년 초 이미 조선어 교과목을 없앴는데 해성학교장을 겸한 배 신부는 최후의 강압조치(1944년 말, 이때는 중학교에서 영어과목도 폐지했다)까지 지탱한 뱃심 있는 신부였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자기가 발행했던「가톨릭소년」잡지가 일제로 인하여 폐간된 것에 대한 반항조처로 생각되며 또 한편으로는 한글에 대한 애착심을 우리와 함께 하려는 강한 의지로 해석하고 싶다.
기타 주요행사
교구 내 많은 본당과 교육시설 공소가 있었기에 여러 가지 행사가 뒤따랐다.
그중에서 가장 큰 행사는 성체거동(현양대회)이었다. 각본당마다 거동일자를 중복되지 않게 정하여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 수도가 평신도들이 참석하도록 했다.
행렬선두에는 수사들로 구성된 7~8명의 푸러스 밴드(악대)의 우렁찬 주악대(소음이 거의 없는 그 당시는 기타 소리도 크게 들렸으니 7~8명의 나팔소리는 온 동네 마을을 진동시켰다)에 그 뒤를 신부수사 수녀 복사대 주교님성광 해성학교학생들 각 단체ㆍ일반신자 하여 최소 4~5백 미터 때로는 천미터에 이르는 긴 행렬로 각종깃발을 휘날리며 성가를 부르면서 한나절동안 마을과 거리를 누빈다. 거동행렬은 질서정연하고 엄숙한 옥외행사였으나 한편 마음에는 일본관헌들로 인하여 점점 더해가는 압박과 설움을 성체거동에서 풀고 일본인들에게 민족적 단합의 과시(誇示)로서『보아라. 이 정도다』하는 뜻도 각자가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었다.
본당마다 거의 해성학교가 있었기에 학교끼리 모여서 해마다 혹은 격년제로 대운동회(주로 축구시합)을 여는일 등 각본당을 순회하면서 기념행사를 했다.
교구창설 주년행사 본당연합대회 본당창설주년행사 베테딕도 성인 주보성인 측일행사 학교 병원의 신축증축행사 등 성대하게 거행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지면에 소개할 수 없는 일을 애석히 생각한다. 이처럼 활발하고 굳건한 신앙심에 민족혼까지 불살으면서 화려했던 속에서 갈망하고 기다렸던 해방과 더붙어 독립만세를 목청 터지게 외치며 애국가를 눈물로 불렀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를 얼마동안, 다음해1946년 누구의 뜻에 의하였는지 연길교구는 와해(瓦解)되고 외국인 성직자는 본국에 추방당하고 한국 신부 수녀들은 붙잡혀 죄수 반동 간첩으로 몰리는 쓰라린 수난의 역사를 당하게 된다.
필자의 원고 제1회분(가톨릭신문 제1633호)가운데 △독일인 추방은1946년에서 1950~1952년에서 사이 △문화혁명 시기는1966~1976년으로 각각 수정합니다. 그리고「애국교회」는 당시교회의 실질 운영을 맡은 신자들의 단체인「애국회」로 바로 잡으며, 애국회 설립은1968년이 아닌 1958년이며 문화혁명 후 즉 1978년 부활하였습니다. 또한 연길교구는 지금도 심양교구에 속하지 않으며 백 주교는 스위스인이 아니고 독일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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