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상주 서문동성당옆에는 일제때부터 성공회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1950년경 우리 성당에서는 라틴어로, 저쪽 성당에서는 우리말로 미사를 비롯하여 모든 전례를 집전하였다.
천주교회 복사단 소년들은 물론이요 어르신네 교우들조차 그 신비스러운 라틴어로 미사를 드린다는 자부심이 대단해서 옆집 성공회에서의 우리말 미사를 깔보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그러다가 1962~5년 로마에서 열린 2차 바티깐 공의회 덕분에 천주교회 성당에서도 우리말로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른바 토착화의 효시요 가정 두드러진 사례라 하겠다.
공의회 이후 우리나라 가톨릭신학계에서도 때때로 토착화문제를 거론해왔다. 허나 토착화의 당위성만 거듭 주장할뿐 구체적인 시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원론만 만복할 뿐 각론을 다루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신학작업의 역사가 일천한 탓인가, 너나없이 서구신학을 도입, 보급하는데 급급할뿐 우리 나름대로의 신학을 구상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개신교 신학계에서는 서남동ㆍ안병무 교수가 앞장서서 이른바 민중신학을 제창한 바 있거니와, 가톨릭 신학계에서는 겨레와 우리 앞에 내어놓을만한 신학을 갖추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 신학계가 불모지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목 현장에는 토착화를 구상하고 실천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데, 그 중에서 청담동 본당주임 김수창 신부님과 가톨릭농민회 지도 정호경 신부님이 돋보인다.
우선, 김창수 신부님은 진선적이고 담대한 성격을 타고나신데다 하느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릴줄 아시는 분이다. 신부님은 명동ㆍ홍제동ㆍ청담동본당을 두루 거치면서 몇가지 주목할만한 토착화 작업을 시도한바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공동참회 예식과 제사 예식이 미우 시의적절하고 호응도도 높다고 한다. 김신부님의 토착화사상을 좀더 알고 싶으면, 금년봄 사제서품 은경축을 맞아 제3기획에서 펴낸 김신부님의 문집 「세상을 책임질 사람」을 일독하기 바란다.
정호경 신부님은 안동교구 농민회 지도 11년, 전국 농민회지도 6년, 이렇게 청춘을 농민사목에 바치시는 분이다. 본디 치밀하고 조직적인 성격을 타고 나신 분이시라 농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느끼신 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나눔과 섬김의 공동체ㆍ농민사목」(분도출판사 1984년),「더불어 살기운동」(한길사 1986년)을 펴내셨다. 참으로 독창적이고 신선한 교회론이다.
마침내 구수한 된장냄새 풍기는 교회론이 이 따에 태어난 것이다. 민중신학을 창시한 서남동 목사님은 정신부님의「나눔과 성김의 공동체」머리말을 쓰고 곧 임종하셨는데 목사님은 정신부님의 글을 극친하여 진짜 민중신학의 표본이라 하셨다. 요즈음 정신부님은 「농민교리서」(분도출판사 근간)를 집필중이신데, 이는 한국적 교리서의 첫번째 성공사례가 되리라 여겨 벌써부터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나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생각할 때마다 참 불쌍하다는 느낌이 든다. 우선 그분들이야말로 편협한 서구신학의 희생자들인 까닭이요 다음으로는 신앙의 후손들인 우리가 선조들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사건이거니와, 1791년 전라도 지산 선비 윤지충이 모친 권씨가 별세하자 위패도 만들지 않고 제사도지내지 않았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신유박해가 일어났으니, 곧 조정에서는 천주학쟁이들을 부모도 모르는 불효자, 인륜을 저버린 짐승의 무리, 국사범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179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해서 1백여년 교난에 1만여명 순교자가 생겼고 그 가운데서 103명이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으로 추숭되었다.
이를 두고 장한 역사라 하여 찬양만 할 것인가?
그럴수는 없다. 실상 16세기말 중국에서 선교한 예수회원들은 조상 제사를 효도의 표현으로 이해하여 허용하였었다. 허나 그들보다 반세기를 뒤늦게 도착한 도미니꼬ㆍ프란치스꼬 회원들은 제사를 미신으로 보고 단죄하였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치열한 의례논쟁(儀禮論爭)이 일어났는데, 제사를 단죄하는 설이 득세하여야 마침내 1715년 클레멘스 11세 교황과, 1742년 베메딕또 14세 교황이 조상 제사를 단죄, 금지시켰다.
이어 1790년에는 알렉산드르 드 구베아 북경 주교가 조선 교우들어게 조상 제사금 지령을 내렸다. 그 결과가 처절한 순교사인 것이다. 1939년에 이르러 비오 12세 교황이 조상제사를 부분적으로 허용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겠다.(자세한 것은 가톨릭대사전, 1047~1050쪽:최기복,「조상제사 문제」참조) 돌이켜 보건대 조상제사를 미신으로 단죄한 당대의 편협한 서구신학이 한스럽다. 서구의 배타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신학이 초래한 엄청난 희생 앞에서 신학이 역기능을 되새기지않을 수 없다.
옛적에는 그랫다치고 요즈음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을 제대로 섬기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것만 같다. 서구인들을 흉내내어 우리 순교 성인들을 흉내내어 우리 순교 성인들의 유해를 나누어 여기 저기에 전시하고 있는데 실로 망측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예로 김대건 성인 신부님의 유해는 절두산, 가톨릭대학, 미리내,감곡, 대구 복자성당 등지에 흩어져있다.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유골을 토막내는 극형인 부관참시를 연상케 한다. 이제라도 사방에 흩어진 유해를 한곡에 모아, 양지바르고 조강한 명당에 모시고 철따라 참배하는게 우리네 미풍이요 법도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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