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전 필리핀의 아시아사목연수원 참석을 앞두고 나는 짧은 영어를 보충 하려고 석달쯤 미리 마닐라로 향하였다. 도착해보니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로 정말 견디기 힘든 계절이었다. 하지만 영어 학원을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곳 기후에 적응은 커녕 날이갈수록 더 맥이 빠져만갔다. 게다가 몸에 두드러기가 생겼는데 병원약을 계속 발랐지만 속수무책으로 자꾸 번져만 간다. 신경통까지 생겨 쑤시고 무엇보다 너무 가려워서 잠을 잘수가 없었다. 그곳 한국신부들과 의논했더니 걱정하면서 개학까지는 아직 한달이상 남았으니 한국에 갔다 오라고 권한다. 그러나 1년계획으로 많은 분들의 따뜻한 송별을 받고 떠난 사람이 불과 40여일만에 귀국하다니 이런낭패가 어디있단 말인가. 그래서 상의끝에 비밀리에 조용히 갔다오기로 결정을 보았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는대로 성모영보수녀원 용인농장으로 직행하였다. 사연을 말하고 외부사람들에겐 절대비밀로 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 힘들던 피부병은 작은 약 몇알로 그날부터 좋아져 닷새가 지나자 모두 완치되었다. 한달동안 혼자 영어공부도 꽤 많이 할 수 있어서 계획대로 잘되고있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실제로는 귀국 바로 다음날부터 나의 잠입이 들통나면서 어머니는 병환이 날 정도로 나의 본가는 발칵 뒤집혔고 교구에서도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심코 기입해둔 연락처인 어머니집으로 공항측에서 전화로 나를 찾았을 때 외국에 갔다고 대답하니 전날 분명히 귀국했음을 알렸다는것이다. 아마 동남아에 콜레라가 발생하여 일단 귀국한 사람들도 불러다가 예방주사를 맞히려 했던 것 같다.
가족은 즉시 교구청에 알아봤지만 모른다하고, 교구는 교구대로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나의 거처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전국의 주교님들에게가지 알려지게된 유명한 증발사건이 되고 말았다.
어느날 뜻밖에 동생의 편지가 날아왔다. 내가 평소 용인수녀원에 자주 가던 것을 알기에 혹시나 해서 어머니는 물론 추기경님과 어른들이 걱정하고 계심을 알린 것이다. 즉시 글을 올렸다. 6페이지에 달하는 편지를 읽어보신 경갑룡 보좌주교님은 전화를 걸어 내 편지는 마치 탐정소설 같더라고 말씀하셨다.
예정대로 다시 마닐라로 돌아오자마자 무사히 도착했음을 카드로 알려드렸다. 세상엔 비밀이 없다더니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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