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순교자성월이다. 금년 성월은 그 어느 해보다 현실감을 체온으로 느끼게 한다. 순교자의 삶은 신교자유의 획득을 위한 투쟁과 죽음의 세력에 항거하는 저항의 역사였다. 순교정신을 현양하는 운동의 발자취를 돌이켜보아도 그렇다. 1939년 한국교회는 순교정신 현양운동을 일으키면서 그해 9월 순교자 현양회를 발족하였다. 그러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에 와서 재발족되었다. 오늘의 순교자성월이 있기까지는 투쟁과 저항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금년 여름은 천재지변과 민주화의 열기로 어느해 여름보다 무덥게 느낀 여름이었다. 터질것은 터져야 한다. 벙어리가 말을 못한다고 속자차 없는 것은 아니다. 27년동안 민중이 구속과 억제 아래에서 철저히 배운것은 자유와 권리였다. 27년의 역사는 투쟁과 저항의 역사였다. 민심이 천심이된 시류(時派)는 어느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그 사실을 목격하였다.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모르는 치자(治者)는 정신나간 사람이다.
천주교도 8천여명을 죽게한 대원군은 1881년 불교의 스님들이게 자기가 처형한 천주교도를 위해 불공을 부탁한 적이 있다. 그리고 1889년에는 병인박해를 후회하면서 당시 조선교구장을 방문하여 용서를 청하려고 저의하였다. 대원군의 태도나 6ㆍ29의 결단은 모두가 시류앞에 승복한 것이다. 이제 대원군의 참회와 고백을 아는 천주교도라면 그의 행업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의 행동을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 참회와 고백이 미움을 씻어 버린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연상하면서 오늘의 한국현실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할 책임자에게 감히 충언한다면 국민 앞에 역사적 과오를 시인하는 참회와 고백을 바라는 것이다. 그길만이 민중의 한(恨)맺힌 응어리를 풀고 이민족을 더욱 위대한 민족으로 세계만방에 다시 확인시키게 될 것이다. 회개와 고백은 그리스도의 부활 앞에 무릎을 꿇고 사는 교회에 절실히 요청된다. 교회는 의인들의 집단이기에 앞서 죄인의 집단이다. 과거 박해시대의 교회사가 그러했다. 우리 조상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겸허하게 고백하며 살았다. 오늘날 지식인들의 일각에서는 우리 조상들의 신앙생활이 고백성사를 중심으로 살았다해서 내세사상에 침혹된 행위로 평가한다. 그러나 참회와 고백이 생활화된 의식의 표현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님들은 자기와 현실에 대한 칙임의식을 잠시도 잊지않았다. 그래서 죽음의 세력에 저항하면서도 격앙된 감정에서 이성의 논리성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양상이든 힘으로 대항하지 않았고 영웅주의의 모습은 찾아볼수 없다. 어린양처럼 죽음의 세력을 향해 자기의 삶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하느님을 증거하는 웅변도 없었다. 역사는 현재의 현실이다. 역사의 심판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것이다. 역사는 과거 한국교회가 겪은 죽음의 세력에 투쟁하던 저항의 역사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민족의 고난을 외면하였던 역사에 대해서는 지탄하고 있다. 교회보호와 이익에 연연하던 역사는 수치의 역사였다.
오늘날 어두운 현실과 권력 앞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입과 손발이 되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것은 수치스러웠던 역사의 자성과 고백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이게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회개와 교복이다. 교회는 이 사회에 참회와 고백을 가르치면서 무죄한 빌라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요즘 교회의 일각에서는 순교자 신심에 대한 자성론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가 1백 위의 성인을 모신 것으로 만족하거나 자랑하고 있을 뿐 순교정신을 실현하려는 삶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이 나라 현실의 문제가 어찌 정치권력에만 있겠는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의식구조가 병들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주의ㆍ 주장과 이념의 절대화, 쾌락과 햔락의 추구, 물질주의에 중풍든 의식, 안일무사한 현실주의, 자기와 자기 소속집단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독선과 권위주의의 횡포, 책임감이 결여된 주인의식, 무관심한 역사의식이 이 민족을 죽음에 이르도록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현실에 살고 있는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순교신앙은 「죽은이의 죽은 신앙」이 아니라 「죽음의 신앙」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로마6,9) 신앙이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 순교자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가를 생각하는 건전한 인생관, 무엇이 좋고 나쁜지 분별하며 행동하는 확고한 가치관, 자기삶에 영원히 책임을 지는 역사의식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감정을 존중하기보다 이성과 강한 의지력에 밑줄을 그으며 살아갔다. 님들은 성령을 쇄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쇄신된 사람들이었다.
님들은 자기를 위해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을 더 높은 세계와 더큰 가치름을 위해 포기한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희생이요 헌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나는 나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어떤 희생과 헌신을 하고 있는가 ?
누가 누구에게 순교정신을 본받으라 요구하겠는가. 그것은 「나」부터이다. 우리 각자 모두가 그러해야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여야한다. 그것이, 따르는 양들의 바램이다. 시대는 날로 발전하고 사람은 성숙해가고 있다. 교회는 쇄신된 정신으로 변모되어야 한다. 때는 바로 지금이다. 성인은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치못함을 고백하는 사람임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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