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라는 나무는 본시 피를 밑거름으로 하여 뿌리내려 자라고 꽃피고 앵근다고는 하지만 요즈음의 한국상황을 보면 얼마나 더 피를 흘려야 민주화가 이뤄질지 심히 걱정스럽다.
다행히 온국민의 숙원이었던 대통령직선제 새 헌법이 이뤄지게는 되었지만 격렬한 노사분규와 비록 소수이긴 해도 새 헌법이고 뭐고 다 집어 치고 혁명적 새정부를 수립해야 된다는 극한적 주장 등 사회불안과 급진적인 주장들이 걱정스럽다. 거기에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흑백논리, 세상에 믿을놈 하나도 없다는 불신사조등 뿌리깊은 배타의식에서 나오는 갖가지 작태들을 볼라치면 민주의 꽃이 피기도 전에 봉우리째 시들어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더구나 자칫 「안보」「국가존립위기」등의 명분을 주워 애써 쟁취한 오랜만의 민주화기회를 또다시 박탈당한채 「죽쒀서 개 좋은 일 시키는」격이되지나 않을까 하는 기우마저 느끼게도 한다.
오늘의 이러한 현상과 불행한 풍토는 그만한 이유와 당위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멀리는 이조왕조 및 봉건시대의 엄격한 사회제도(반상제도)하에서 굴종만을 당하면서 맺힌 한(恨), 일제의 탄압과 관료주의 위압속에서 받은 민중의 설움 등이 잠재적인 원인이라면 가까운 원인은 해방 이후 독재자들의 탄압과 횡포일 것이다.
민주주의 간판을 내건지 45년, 날이 갈수록 민주 발전은 고사하고 독재는 더욱 악랄해져서 헌법은 독재정권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누더기가 되어 왔고 자유와 기본권마저 철저히 유린당하는 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불신은 물론 국민들 사이마저 불신과 괴리가 심화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현상은 그처럼 오랫동안 가슴속 깊이 맺혔던 응어리가 터지는 아픔의 현상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유가, 기본권이 안보란 미명하에 속박당하고 유린되었으며, 사회불안조성, 용공내지는 좌경세력이라는 굴레로 정의가 피를 흘렸던가!
즉 오늘의 비현실적이고 상식을 벗어난 주장들도 독재정권의 기만과 탄압에 대한 역작용이요, 과격한 노사분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동안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 채 혹사당했던 울분과, 기업인들이 정권과 결탁하여 부를 누리면서도 분배정의를 묵살해 온데 대한 반감등 안으로 안으로 누적되어 왔던 욕구가 위험수위를 넘어 둑이 터져 쏟아져 넘쳐 흐르는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독재와 불신에 대한 저항이요 자기 권익을 찾기 위한 시위라고 할지라도 도로를 점령하고 기물을 파괴하며 사람을 구금하고 때리는 등의 비이성적 행동을 해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이러한 비이성적인 행동은 그들을 아끼고 동조하던 국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다는 사실과 특히 오랜만에 찾아온 민주희생의 기회마저 다시 빼앗을 명분이나 기회를 줄 지도 모른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할것이다.
여리긴 하지만 이제 민주화의 빛이 비쳐졌다. 6ㆍ29선언을 계기로 반사의 민주주의가 치료받기 시작했고 새 삶을 향해 꿈틀거리고 있다. 물론 6ㆍ29선언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의 말대로 이것은 사탕발림 술수일 수도 있다. 하도 여러번 속아온터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불신만 할것이 아니라 이를 받아드여 진정 민주화의 계기로 만들어야 하겠다.
더구나 그것이 술수라면 그런 위선과 거짓이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더이상 속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때이다.
민주화는 결코 헌법개정이나 제도의 변형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민주나무를 키우고 아끼며 지키는 주인이 될 때만 가능한 것이며 위정자들이 법을 국민들을 위해서 운영할때 민주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간 독재가 자행될 수 있었던 것도 법율정권욕을 위한 억지운영에도 있었지만 국민들이 그런짓을 할 수 있도록 저지못한데도 원인이 있는 것이다.
필자는 2년전 7개월동안 마닐라에서 사목연수를 하면서 필리핀 문주화현장을 직접보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필리핀 민주화성취과정은 질서정연하고 성숙된, 그리고 국민 모두가 동참하는 민주대행진이었고 평화적 대장정이었다.
또한 필리핀의 민주화는 현대통령의 남편인 아키노 상원의원을 비롯하여 선거감시를 하다가 총탄에 쓰러진 전주지사 하비어씨의 죽음 등 많은 민주투사들의 죽음, 목숨을 내걸고 선거를 감시하던 수천명의 자원봉사자들의 헌신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교단을 비롯한 지역기초교회공동체 책임자 등 교회의 끊임없는 예언직수행과 계도(啓導) 등이 크게 주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필리핀 민주화의 꽃은 역시 닷새동안 연일 1백 5십만~2백만이 모여든 시위군중들의 일치와 질서였다.
더구나 데모가 일어나자 경찰은 어디론가 전부 사라져 버렸는데도 강도나 방화는 고사하고 유리창 하나 깨지않고 극단적인 구호도 한다미없이 질서를 지키며 끝까지 평화적인 데모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평화적인 시위를 할 수 있는 뒷면에는 그들의 몸에 밴 가톨릭종교적 영향과 타고난 낙천적 국민기질의 영향도 있겠지만 중요한 이 시점에 처해있는 우리들은 그들의 높은 수준과 방법을 배워야 되리라고 여겨져 적어본 것이다.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서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고 피를 흘렸다. 우리 모두는 민주와 정의의 파수꾼, 당리당책이나 사심을 버리고 한 덩어리가 되어 이번엔 기필코 민주화를 이뤄야 하겠다.
민주여 꽃피어라.
민주여 영글어라.
◇1934년 충남 당진生
◇61년 사제서품
◇대전교구 사목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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