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한국 가톨릭 장애자복지협의회가 9월 12일ㆍ13일 제1회 전국 가톨릭장애자 복지대회 행사의 일환으로 장애자들의 정서함양과 창작의욕을 북돋우기위해 공모한 장애자 문예작품중 최우수작이다.
노란 은행잎들이 수많은 나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 앉고가 뒤를 조용히 가을볕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두렵고 떨리는 가슴으로 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섰다. 애타는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푸르름이 잠시 눈으로 비쳐들었으나 이내 눈물이 그걸 지우고 말았다. 어쩌면 마지막 보는 하늘의 푸르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30분쯤 걸어 내가 사는 안양시에서는 큰 병원으로 알려진 종합병원에 도착하였다. 병원에 들어서니 뜻밖에도 담임 선생님께서 와 계셨다.
선생님께서는 내 손목을 잡으시며 말슴하셨다.『선생님은 네 수술이 잘 되어 다른 아이들과 같이 공부도 하고 마음껏 뛰놀기를 바란단다. 혹시 실패가 되더라도 절망과 좌설속에 빠지지말고 꿋꿋이 참고 일어나 네 삶의 길을 찾아 땅을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부디 성공하기를 빌겠어』말씀을 마치신 선생님께서는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가셨다.
점점 멀어져가는 선생님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선생님께서 일러 주신 그 말씀 결코 잊지않고 마음에 새겨 두겠어요』
마침내 의사 선생님과 간호원 누나의 부축을 받으며 수술실로 들어섰다. 나는 두눈을 꼭감고 수술이 잘 되어 다시 잘 보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수술이 어떻게 사직되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른다. 지루한 다섯시간, 꿈속같은 희망함 속에서 아직도 수술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1984년 10월 6일 온갖 찬란하고 아름다운 색깔들과의 이별, 밝은 세상과의 영원한 안녕이 시작된 것이다. 여전히 병원창가에도 은행잎은 날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한지 3일만에 퇴원하는날이 되었다. 여러날 입원한 뒤라서 그런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내눈에 감긴 붕대를 푸시고 안경을 쒸워 주시며 물으셨다.
『자, 눈을 크게 뚜고 여길 봐라. 뭔가가 보이니?』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눈을 떴다. 그리고 다움순간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절망을 느껴야만했다. 보이는 거라고는 단한가지 어두운 밤같이 스며드는 캄캄한 암흑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술에 실패했구나」그러나 다음 순간 내 머리 속을 힘차게 두들기는 말한마디가 있었다. 「수술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절망과 좌절속에 빠지지 말고 꿋꿋이 참고 일어나 네 삶의 길을 찾아 땅을 박차고 일어나거라」그때 선생님의 말씀이 나의 큰 힘이 되어준것이다. 「그래, 다시 시작해보는거다! 내 삶의 길을 찾아서」속으로 이렇게 다짐하면서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을 나섰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이 사납게 내 귓가를 때리고 지나갔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닿았으나 나를 맞는 가족들의 마음은 슬픔과 안타까움 때문인지 굳어져 있는것만 같았다.
그후 일년동안 꼼짝도 않고 방구석에만 틀어박혀있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누굴 만나는 일도 식구들과 말을 주고받는 것도 귀찮아졌다. 운동부족으로 몸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졌다. 일년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왔다. 뜨거운 태양이 세상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릴듯이 무덥던 어느날 수녀님 한분과 선생님한분이 찾아 오셨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안녕하셔요』하고 인사를 했다.
『저 아이가 봉민인가요? 참 똑똑해 보이고 공부도 잘하게 생겼네요』수녀님께서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예. 고맙습니다. 저 애도 학교에 다닐적만 해도 남달리 성실했고 공부도 잘 했었지요』
어머니께서 말씀을 끝내시자 선생님 한 분이 계속해서 말씀을 이으셨다. 『저애는 공부를 가르쳐야 해요. 이렇게 있다가는 영영 이 아이의 장래를 열어줄 수 없으 거여요』하시며 나를 걱정해주셨다. 어머니께서는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결심을 하신듯 나를 학교로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 나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더이상 어른들의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해가 서산마루로 넘어갈 때쯤 그분들은 떠나셨다. 그날부터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맹학교엘 가자고 달래셨다. 그러나 나는 망설여지기만 하였다. 안 가자니 내 사진이 부끄럽고 가자니 두렵고 하여 어느쪽을 택할지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끈질긴 어머니의 설득으로 끝내 두손을 들수밖에 없었다. 여름방학이 끝나던 8월말 아버리를 따라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안고 모든 것이 설기만한 충주로 왔다. 처음 얼마동안 집에 그리워 울고만 싶었고 낯선곳에서 어색하기도 하고 식구들 생각때문에 집에만 가고 싶었다.
새로 태어나는 아픔,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야만 하는 세월이 꿈같이 흘렀다. 울고 웃으며 지낸 2년은 나를 참으로 많이 변하게 해 주었다. 점자를 배우고 타자를 익히는 동안 생각대로 되지 않아, 가슴이 터질듯한 답답함을 이겨내야만 하는 고통의 순간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날들이 흘러간 지금 나 자신이 꽤나 철이든 것 같다. 이제는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의 앞날을 용기있게 열어나가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보기도 한다.
빛과 어둠이 뒤바뀌고 여러일들이 한꺼번에 엉클어져 사납게 휘몰아친 지난 몇년을 지금은 조용한 마음으로 가만히 돌아보며 웃음지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된것 같다.
나는 오늘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본다.
『하느님 허락하신다면 좀 더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고 싶습니다. 제게 용기와 인내와 지혜를 함께 허락해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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