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간사회에 잔존하고 있는 샤머니즘이 과학문명의 산물이라는 영화에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사(告祀)지내기다. 영화계는 촬영장에 앞서 으례껏 돼지머리를 모셔(?)놓고 먼저 제를 갖추는 것을 오랜 관습으로 하고있다. 촬영 중에 무사고를 기원하는 미신의 일종이다. 물론 촬영기재를 좌우에 진열해 놓고 제작자 감독 등의 순으로 돼지머리에 절을 하기 마련인데 이때 이른바 「믿는 사람들」의 내심의 갈등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믿는 사람들이란 가톨릭 혹은 개신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두고 주변에서 일컫는 말이다. 조감독 시절의 일이다. 모시고 있는 감독이 공교롭게도 믿는 사람이었다. 개신교를 믿는 이 분은 돼지머리와의 상견례가 있을때마다 언제나 딴전을 피우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조감독이 대신 멍에를 걸머질 수 밖에. 그러나 조감독인 나도 믿는 사람인지라 언제부터인가 요령주의를 터득해서 다음의 제2조감독에게 제(祭)에 참가하는 영예를 물려주곤 했는데 한번은 영낙없이 걸려든 적이 있었다. 또 다른 작품을 할 때의 일인데 그날따라
새롭게 만나는 제작진들이 막무가내로 감독 아니면 제1조감독이라도 제(祭)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신심이 없었던 나는 주위의 험상 궂은 인상에 위압되어 일을 치를 수 밖에 없었는데-. 딴에는 궁리랍시고 얼른 돌아서서 살짝 성호를 긋고는 돼지머리를 보고 절하면서 마음속으로 「주님, 이것은 가짜이옵니다」하고 용서를 구하긴 했었다.
따지고보면 아무리 궁여지책이라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이 야훼와의 약속을 깨트린것처럼 우상숭배의 형용을 갖추기는 매한가지였다. 가책의 후유증이 꽤나 오래 갔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후 막상 감독의 자리에 오르게되자 이제는 신앙을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지라 아예 감독을 제쳐두고 저희들끼리 잔치를 벌이곤했다. 그러나 영화감독으로 몸담고 있는 한 돼지머리의 환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무렵 뜻을 같이하던 가톨릭연예인협회 몇몇 회원과 궁리한것이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의 작품을 신부님께 부탁드려 축성을 받자는 것이었다. 그 첫번째 축성이 당시의 협회회장 강대창씨의 작품제작을 계기로 회원 몇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기선 신부님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금은 우리들의 신앙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십수년전의 그 무렵만해도 돼지머리의 환상은 꽤나 위협(?)적인 존재였다.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송광섭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호부터는 영화감독겸 평론가로 활동하시는 김사겸씨께서 이난을 맡아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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