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비참ㆍ고통의 인간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고 원인을 탐색하지 않으면서 오늘날 영성을 말할 수는 없다. 이 같은 불의의 체제에 대해 싸우지 않고서는 영성적일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영성의 정의의 차원이다.
『네 동생이 어디있느냐』는 창세기의 이 질문은 우리의 형제ㆍ자매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야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해준다. 하느님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정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
정의는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형태이다. 오늘날의 사랑은 자선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형성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샘이 오염돼 있다면 컵을 깨끗이 하는 것은 소용없고 상수도 구조를 깨끗이 해야 우리가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살 수 있다. 이를 위한 근본적인 우리의 노력이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영성이다.
이 정의와 사랑의 영성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생명」 이다. 이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불의이며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오늘날 정의 사랑 실천은 생명의 옹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핵무기ㆍ전쟁ㆍ경제의 불균형 등으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특히 기본이 되는 것은 육체의 생명이며 경제적 활동은 육체적 생활과 밀접하기에 영성생활에서 구하는 하느님 사랑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육체적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경제체제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는 필요한 것의 욕구일 따름이지 사유재산의 문제가 아니다. 불의ㆍ폭력은 경제체제나 구조의 본성안에 있고 이에 대항, 싸우는 것이 영성의 주요 부분이다. 오늘의 영성은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에 도전, 자유ㆍ평등 창조성을 보호하는 새 체제를 추구한다.
정의는 또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의 관심사는 가난ㆍ정의 교육문제 등 국가의 관심사와 중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과 정의는 정치적인 것이며 교회가 정치밖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성서의 예는 출애급이나 요한 묵시록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바티깐」이 세계 85개국 이상에 대사를 파견하는 것은 교회가 정치역할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성직자ㆍ수도자도 국가의 시민이고 시민권ㆍ투표권이 있다. 투표는 바로 정치행동이며 당과 협력을 표현하는 행동이다. 투표만하고 그 다음날부터 행동하지 않아야한다면 어떻게 될까. 정치적 활동에는 위험과 모험이 뒤따른다고 하는데 평신도만 참여하라고 하고 성직자ㆍ수도자는 안전하게 있어야 하겠는가. 신자들과 함께 앞장서야 한다. 교회는 따로 정치적인 상황에 침묵을 지켜왔는데 이는 정부에 협력하는 행위이다. 결국 교회나 종교ㆍ영성은 정치를 제외시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를 제외한 영성은 추상적이고 내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관심을 갖지않는 종교는 바로 종교 자체가 억압적이 될 수 있다. 정부와 교회는 둘다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다만 교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국가는 국민의 이름으로 봉사하는데 교회는 정부에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협력해야 한다. 이때 협력의 기준은 인간 존엄성이고 절대기준은 오직 하느님이므로 교회는 정부가 절대로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는 정치적 인물이었나에 대해 논란이 많다. 이 질문은 누가 예수를 그분은 권력을, 율법을 비평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분은 땅ㆍ백성ㆍ물건 등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알았다.
수도생활과 서원이 정의와 영성문제와 관련이 있는가 질문해 볼 수 있다. 인간의 소명은 사랑과 공동체 건설에 있고 수도자의 소명은 이보다 오히려 더욱 강화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투신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신은 믿음 희망 사랑으로 표현되며 세례 성체성사들 통해 상징으로 전례의식으로 표현된다. 세례는 물의 예식이 중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투신하는 일이 핵심이다.
수도생활의 3가지 허원중 가난의 의미는 전통적으로 개인소유의 포기이며 물질로 부터 이탈이었다. 현재는 가난한 이들에게 투신하고 연대성을 갖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정결허원은 전통적으로 성생활의 포기였다. 그러나 가정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사는 것은 보다 깊은 사랑을 폭넓게 투신하기 위해,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험과 모험에 자신을 내어놓기 위해 투쟁에 앞장서기 위한 것이다. 순명허원은 자유의 표기가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모으는 것이다. 많은 선과 마음이 합쳐져야 좋은 일을 할수 있기 때문이다. 순명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투신하는 것으로 장상이 순명의 영역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장상도 순명하는 사람이 돼야한다. 수도서원도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에서 재해석 해야하며 정의는 바로 자신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정의 영성을 성서의「착한 사마리아인」을 예로 다시 살펴보자. 이 성서 구절에서 사제나 레위인의 행동이 바로 영성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한 일이 오늘날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개인적으로 돌보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빼앗기고 상처받은 나라ㆍ사회ㆍ문화를 새로운 상황으로 새로운 구조질서로 옮겨가야하는 일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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