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까지만해도 우리는 미국을 매우 우호적인 눈길로 보아왔다.
엄밀한 검토없이 널리 퍼지게 된 이러한 매우 우호적인 미국관에 젖어 있던 한국사회는 80년대초 대학생들이 미국문화관을 점거하고 광주에서의 비극에 대한 칙임의 일부를 미국에게 묻는 사태가 벌어졌을때, 또 미국이 한국의 민주문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목청을 높였을때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미구호는 일반적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였다. 따라서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매우 불안한 눈초리와 비판적인 경계심을 갖고 학생들의 언동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입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미국 비판이 나오기 시작된 이래 불과 몇해가 지나지 않은 오늘, 미국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민족의 발전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는 인식이 각계각층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큰변화라면 변화라 하겠다.
물론 여기에는 경제적 시련기를 맞은 미국이 한국상품에 대해 부당한 제재를 가하는 한편으로 한국시장을 무리하게 개방하라는 직접적 압력을 넣은데 대한 민족적 반발심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어쨌거나 최근 미국을 방문한 여당의 총재에서 학생들의 반미감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게 되기까지에는 민족적 각성을 촉구해온 진보적 학생및 지식인의 공로가 컸다.
국민적 신뢰의 바탕이 전혀없는 정권을 정통성이 있는 민간정부로 갈아치우려는 힘겨운 백병전의 와중에서는 정통성이 없는 정권을 지원하거나 묵인하는 세력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아무리 과격한 것이라해도 도덕적 권위와 타당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학생들 일각에서 반미감정이 싹트고 차츰 무성한 나무로 자라나고 있다면 그 나무의 주된 영양 공급원은 바로 이런 도덕적 정당성에 있었다.
이제 이 나무가 우리 앞에 하나의 엄연한 현실로 우뚝 솟은것이 사실이라면 현시점서 우리가 해야될 일은 이 나무에 물과 햇볕을 주는 일이라기보다는 이 나무의 어느가지가 훌륭한 대들보감이고 어느가지에 탐스런 열매가 열릴것인지와 아울러 어느 가지 어느 잎새에 송충이가 우글거리고 있는지 하는 것도 또한 정직하게 관찰하고 정직하게 기술하는 일일것이다.
엄밀히 얘기해서 말없는 다수 민중은 미국의 존재에 대해서 결코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미국이고 우리는 우리인 것이다. 미국이 무슨 일을 하건 그것은 모두 자기들 잘살기 위한것이며 미국이란 우리에게 특별히 잘해주는 것도 특별히 못해주는 것도 없는 또 하나의 남의 라일 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기구한 운명의 탓으로 우리는 다른 외국에 비해 미국의 간섭과 압력혹은 도움을 음으로 양으로 받아왔고 또 받고있을 따름이다. 그들이 압력을 가하고 또는 어쩌다 도움을 준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자신들의 국가적 이익에 관계된 것이니까 그렇게한것이지 우리가 각별히 곱거나 미워서가 아니다. 「소련한테 속지말고 미국에 믿지말자」는 식의 태도가 대다수 한국민중이 미국을 보는시각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와같이 미국을 네팔이나 뉴질랜드와 같은 또다른 하나의 외국에 불과하다고 보는 이해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철없는 생각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이와같은 냉정한 시각은 기본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6ㆍ25가 터지고 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존재로 인해 덕을본 부류의 사람들은 (이들은 대부분이 지배계층에 속한다)미국을 이상화하고 미국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모두 좋다는 지극히 무비판적이고 반민족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고 미국은 천사라는 이러한 거짓된 미국관을 국민들 대상으로 흥보해왔다. 이런 교육을 받은 젊은세대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미국의 얼굴의 구석구석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게 되었고, 역대지배계층의 선전과는 달리 미국이 결코 천사가 아니라는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미국이 천사가 아님을 소리 높여 외치는 가운데 어느덧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 반해버린 일부 학생들은 급기야 미국은 천사가 아니라 천사의 탈을쓴 악마라고 주장하기에이른다. 그들에게 미국을 천사로 보도록 강요해온 지배계층에 대한 강렬한 항의와 반항인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있는 지구상의 살림살이가 모두 미국의 거대한 음모의 소산이라는 이론이 미국의 직접적인 간섭과 압력에 시달려온 중남미에서 나오게 되었고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종속이론인바,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체제가 땅위에 존속하는 한 만국평등의 지상낙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일면이 진실성을 분명히 가진 이 이론은 미국을 악마로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 이론적 틀을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미국은 한날 외국에 불과한 존재가 분명아니다. 실상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에 그들로부터 말미암은 질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젊은 세대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대로 우리의 민족적 발전에 있어 미국은 악마적인 속성을 언제든지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순전히 악마인것만도 아니다. 민중들의 기본적으로 건강한 미국관이 처음부터 그런 것이듯이 미국은 자신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미국은 천사라는 가당치도 않은 호들갑과 아울러 미국은 악마일 뿐이라는 또다른 비민중적인 호들갑도 미련없이 던져버려야 한다. 이런 호들갑이 우리의 민족문제의 파악과 해결에 일정한 기여를 한 부분도 있지만 지금은 미국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매우 복잡한 시각으로 냉정히 또 섬세히 분석검토하여 이에 알맞는 대응책을 찾아야 할 때이다. 우리에게 중요한것은 우리민족의 삶을 행복의 길로 이끄는 일이며, 여기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미국이라는 존재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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