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이 창간 60돌을 한해 앞두고 지령(紙齡) 1천 5백호를 맞았다. 창간당시 월간으로 시작하여 모든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선각적 평신도들에 의해 유지되어 오는 동안 그 고난이 얼마나 컸던가는 최초의 지령 5백호를 기록하는데 무려 38년이란 긴 세월을 보냈음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초창기 월간에서 순간(순간)으로, 당시 주간(주간)으로 그 발행 면수를 4면에서 8면으로, 판형을 국배판에서 파블로이드판으로, 다시 신문판으로, 이렇게 겨자씨만한 조그만한 출발이 이제 온갖 새들이 깃들며 쉬어갈만큼 거목으로 자랐음에 기쁨과 감사를 금할길 없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겸손된 자세로 면수를 현재의 8면에서 12면으로 또 16면으로 확대하여 마침내는 이땅에 가톨릭 일간(日刊)으로 발돋움 하고픈 것이 우리의 꿈이자 희망으로 삼고 싶은 것이다.
우리 가톨릭신문의 역사는 그 창간에서부터 한국 교회사의 특징과 비슷한데가 있다. 한국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평신도에 의해 창립되었음과 같이 가톨릭신문 또한 평신도에 의해 발의, 창간되어 초창기 상당한 기간동안 평신도들의 피와 땀의 희생을 바탕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가톨릭신문이 이렇게 평신도에 뿌리를 박고 자라난 신문이기에 숱한 난관을 겪으면서도 시들지않고 오늘날까지 날로 번성해가고 있는것이다. 만약 평신도가 아닌 다른 어떤 계층이나 기관, 단체가 창간했더라면 과연 오늘날까지 존속되어 왔을까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한다.
또 한가지, 가톨릭신문에 종사하는 우리 종사자 일동은 성령께서 가톨릭신문에 대해 정용하고 계신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창간당시 평신도들의 선견지명과 열성을 보아도 마치 성령을 받고 전도하러 뛰쳐나간 사도들의 모습과 비슷하고 그후 온갖난관을 극복해 낸것도 교회가 어려울때 마다 성령의 은혜로 구해주심과 비슷하게 느끼는 것이다.
가까운 때만 하더라도 지난 1970년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렵던 시기에 교회와 집권층간의 묘한 갈등관계를 헤쳐나오는 과정에, 때로는 집권층으로부터 압력을 받기도 했고 때로는 교회내의 여론에 호되게 얻어 맞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오늘 지령 1천 5백호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와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절실히 느끼듯이 우리 가톨릭신문의 지난날을 함께 살아온 우리들은 너무도 기묘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오늘날 가톨릭신문이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로 볼 때 그 비중은 엄청난 것인데 이런 큰일을 소수의, 그것도 천학비재(淺學菲才)인 우리 종사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필연코 우리의 머리와 손을 성령께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하는 것이다.
이제 반세기가 넘도록 이 나라 교회에 봉사해온 가톨릭신문을 아껴주시고 후원해 주신 모든분들께 이날을 맞아 감사를 드리면서 또다시 더넓은 아량과 이해로써 아껴주시고 도와주시도록 호소해보고자 한다. 사실 돌이켜보면 우리 교회만큼 언론의 자유가 없는 사회도 드물것이다. 매스컴교령은 취재와 보도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데도 우리 한국교회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취재원이 봉쇄당하고 보도의 자유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제한받고 있다.
걸핏하면 항의요 대중앞에서 기자가 모욕을 당하기는 예사다. 거기다 흔해빠진게 불매운동이다. 내생각과같은 주장을 하면 좋아하고 내 의견과 다른 주장도 있음을 보도하면 불매운동이다. 그러고서도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기본은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데서 부터 출발하고 세상에는 여러사람이 살아가듯, 의견또한 구구하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제 복음화 3세기를 맞아 새로운 단계의 도약을 모색하고 있고 현대세계가 매스컴의 위력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있는 이때 유독 한국교회만 아직도 이방면에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란 없을 것이다. 최근 활자매체를 통한 홍보수단은 상당한 활기를 띠고있지만 그것도 그 종류와 방법이 서로 비슷해서 상호 견제의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한국교회는 출판활동에 있어서 상호 경쟁적 발전을 기대하기란 시기상조요 그래서 가능한대로 서로 보완적인 발전을 꾀해야 하는것이다. 같은 간별(刊別)끼리 경쟁하고 비슷한 편집내용끼리 경쟁한다면 서로가 피해를 입을뿐이다.
끝으로 다시 한번 한국교회와 애독자 여러분께 간곡한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진정코 주님의 사랑받는 교회가 되기위해 형제간에, 지역교회간에, 또 생각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간에 미움과 질시를 멀리하고 참으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보자는 것이다. 이를위해 가톨릭신문은 기꺼이 모든지면을 일치와 화해를 위한 대화의 광장이 될 것이고 우리 종사자 모두는 어떠한 충고나 질책도 수용할 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감히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의 결심과 각오가 헛되지 않아 하느님과 가톨릭신문이 될 수 있도록 애독자여러분의 충언과 기도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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