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한국천주교회는 조선봉건왕조가 급격히 해체되던 상황에서 단순한 신앙적 열정뿐 아니라 사회적인 병폐와 문제점을 해결하고 근대적인 사회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실천적인 동기와 관련, 창립됐다.
교회의 창립자들은 서학의 종교적 가치를 통해 훼손과 병폐를 나타내던 유교주의를 보완하는 학편, 서학이 내포한 과학과 기술을 수용함으로써 근대사회로의 발전을 도모코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사회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심은 그 후에 나타난 극심한 박해속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각종 사회·문화활동을 통해 표출되고 있었다.
또한 이런 활동에 따라 교회는 봉건사회질서의 청산과 근대사회에로의 이양에 응분의 기여를 할 수 있었다.
2. 개화기와 일제시대의 시대적 상황
이 시기는 봉건황조체제에서 근대 민주국가체제로, 전통적인 농업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前근대적인 사회질서로부터 근대적인 사회질서로 넘어가는 때였으며, 제국주의의 물결과 외세의 침략정책으로 인해 국가의 자주성과 독립성이 소멸되던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한국천주교회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기였다.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박해가 종식되고 신앙과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성직자들이 자유로운 선교활동을 수행함으로써 제도로서의 교회모습을 획립해 나가던 시기였다. 아울러 사회가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요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민족적 요구가 한국교회의 창립정신과 일치될 경우 한국교회는 민족사의 대전환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민족교회로 성장할 가능성을 크게 갖고 있었다.
3.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선교정책
그러나 이런 가능성에도 불구, 당시 교회는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워 교회의 사회참여 폭을 크게 제한했다.
이 정책은 단순히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기위한 수단만은 아니었고 선교사들의 한국교회 사회론이기도 했다.
허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 원칙은 교회의 정치참여일체를 금지한 것은 아니며, 정치권력이나 정치상황에 대해 비판, 항쟁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었다.
교구장들은 이 원칙을 교회의 사회활동에 관한 원칙으로 강력히 추진했다.
그들은 의병운동을 반대하고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위를 인정해야 하며, 한국은 일본을 통해 개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성직자나 신자들을 엄격히 단죄했다.
이 정책은 한국교회의 사회활동을 크게 제한하고 신앙형태를 초월주의적, 내세주의적인 것으로 유형화시켰으며 일제의 한국사회 비민족화과정에 간접기여하는 결과를 낳게했다.
4.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사회활동
「제도로서의 교회」 측면에서 볼 때 한국교회는 근대화에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정치권력과의 갈등을 피하면서 기존사업들을 본격화하는 한편 의료·문화·교육사업 등 새로운 사업들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은 한국사회의 필요성보다는 서구 선교사들의 관심과 판단에 의한 것이었고 대부분 한국인의 저급성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한계성을 갖는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측면은 「제도로서의 교회」 보다 시대적 상황과 민족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상당수의 한국인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민족과 국가가 처한 현실에 응답하고 민중이 당하는 수난과 고통에 기꺼이 동참했던 것이다.
수많은 학교설립과 애국계몽운동, 정규하 신부의 의병지원과 풍수원본당 신자들의 의병참여, 서상돈 회장의 국채보상운동, 안중근 의사의 의거, 안명근·이기당 등 수많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항일독립운동, 윤례원 신부의 독립군자금 모금운동, 평신도들로 구성된 항일무력투쟁 단체인 의미단의 활동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5. 결론적 평가
한국천주교회는 오랜 박해과정을 겪은 이후 커다란 성격변화를 나타내고 있었다. 서구 선교사들이 교회를 주도하게 되자 교회창립자들의 정신은 크게 퇴색했으며 민족사의 대전환기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제한시키고 말았다. 이는 한국교회를 서구교회의 식민지로 변모시키고 성장 저해의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속에서도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민족과 국가의 현실에 응답한 사실은 한국교회가 민족사와 완전결렬되는 것을 어느정도나마 방지할 수 있었던 요소로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의 교회사연구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중심삼기보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전개한 활동들에 초점을 둬야할것으로 사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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