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가 스치는듯 접했던 엘리자벳 노벨(A Little)이라는 동시(童詩)를 무척이나 좋아하게끔 되었다.
속세에서는 일반적으로 작고 적은 것에 별로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거나 거의 무시해버리는 경향있기에「조금」이라는 것에 더욱 애착이 가는지도 모른다. 독자와 함께「조금」의 의미를 잠시 되새겨 보고자 한다.
『설탕을 조금 가지고도 음식맛이 달게 되네
음식맛이 달게 되네
비누를 조금 가지고도
내 몸이 깨끗이 되네
햇볕을 조금만 받아도
새싹이 자라네
조금 남은 몽당연필로
책 한 권을 다쓰네
조금 남은 양초에
하늘 하늘 춤추는 불빛
아무리 작더라도 불빛은
즐겁지
조금 웃는 웃음이라도
웃음은 참 이상한 것
살짝웃는 아기웃음은
이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네』
이 작은 詩를 대할 때마다 작고 적은 것을 귀찮게 여겼던 자신을 되돌아보게끔 된다. 조금보다는 많은 것을 원하고 작은 것보다는 큰것이 우대되 사회풍조속에서 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가치관이 변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세웠다 하면 수십층의 고층대형 건물규모는 되어여 하고, 떼였다 하면 경우 시정의 관심사로 부각될 정도로 모든 것이 크고 많아야 하는 외형 우선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시대적 특징을 절감하곤 한다. 소형의 포니는「포돌이」라는 이름으로 격하시키면서 너도 나도 고급승용차 지향성을 띠게되는가 하면 단순한 외형적 아파트 평수에 의해 재력이 평가되기도 한다. 하다못해 이제는 각종 과일도 대형화가 되어간다. 재래종의 조그만 과일에서 즐기던 단맛은 사라지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별신통한 맛이 없는 대형과일만이 성행한다. 일단 외형이 커야만 손님의 손길이 와닿는단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는 사기행각도「손튼여인이나」오대양사건 정도는 되어야 하고, 도둑도 좀도독이 아닌 대도(大盜)수준 정도는 돼야 매스미디어의 각광(?)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온통 사회가 이러해왔기에 교회의 모습이 더더욱 진주처럼 빛나보였는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겸손도 사랑의 정신으로 엮어진 조그맣고 작은 정성 하나 하나를 존중하는 보살핌이 있기에 교회인구가 급증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언제 부터인지 우리 교회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듯하다.
그것도 다름 아닌 속세적인 대형화 바람이고 보니 이를 바라다 보고만 있어야 하는 작은 마음들을 그늘지고 우울하게 만들어간다.
마치 성전건립 촉진대회 내지는 경진대회를 방불케하고 있으니『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안에 살아계시다는것을 모르십니까?』(1고린3,16)하고 누군가에 되묻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한다.
물론 성전보수 내지는 대형 성전건립의 필요성에는 일면 수긍이 간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 전래 2백주년을 계기로 이뤄진 교황님의 방문과 함께 가톨릭의 교세신장이 현저하여 늘어나는 신자수에 못미치는 작은 성전을 늘려야 한다는 그 취지와 정신에 알맞는 방법론을 어떻게 택하느냐가 성패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방법론을 택하는 과정에서 사안의 경중과 완급 및 시기와 상황드의 요인이 차분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또 서울과 지방의 격차 및 상대적인 빈곤감 등 심리적인 요인도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여기저기서 헐려지는 그 멀쩡한 성전을 우리본당에 갖다 놓을 수는 없을까요, 건물이 아까와요, 또 성전없이 남의 세방신세를 지고 있는 본당도 많지 않습니까』하는 지방사제들의 원망어린 이구동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런지? 『멀쩡한 건물헐고 또 성전 짓겠다는데 헌금할 수 없어요, 이게뭡니까, 유행입니까, 누가 누구한테 잘 보이자는 겁니까. 물론 사제가 힘은 들겠지만 어차피 보아와 희생의 길을 자청하고 나선 다망에 미사 대수를 늘리면 어느정도 해결괴지 않습니까. 마치 본당간에 경쟁이라도 하듯이 꼭 새성선을 건림하는데 전력 투구해야할 정도로 교회에서 해야할 중요한 딴 일들이 없다는 겁니까』라는 비판의 소리를 단지 몰지각하고 믿음이 약한자들의 경박한 원성으로만 돌려버려도 되는것인지.
과연 성전건립이 대형화만이 늘어나는 식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책이 될런지, 또 집안의 형제자매 잃고 새식구만 늘려간다고 그 집안이 번창할런지, 마음의 성전은 어딜 가버렷는지, 노자의 제자인 노담의 良賈深藏若虛(양고심장약허)라는 말이 생각난다. 훌륭한 대상인은 좋은 상품을 깊이 감추어두어 가게앞은 마치 텅빈 것 같다는 뜻으로 賢者는 재능을 숨기고 나타내지 않는단다. 마치 분전성시를 이루고 있는듯한 오늘의 교회여, 『적은 누룩이 온러분은 알지 못합니까?』(1고린5,6). 또 작은 것은 아름답다고도 합니다(Small is bea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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