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주, 정부, 건설업체 3자가 합작이된 강제철거와 그에 따른 폭력은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으며, 이들의 물리력에 도시빈민은 당해낼 도리가 없는 무기력한 기층민중이다. 이처럼 재개발 지역에서 가난의 수치를 겪으며, 철거의 위협과 생존권 박탈의 위기속에 놓이 이들이 자그마치 3백 50만이나 된다. 서울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나 되는 도시빈민이 서울에 살고있는데도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실상이다. 모든 것의 가치기준이 일정량의 권력과 재물과 능력이 있어야만이 그 존재가 드러나는 사회의식 구조이기 때문이다. 지배자, 가진자, 능력이 있는자들만이 인간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는 사회의식은 기실 3분의 1이나 되는 도시빈민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느 장님, 귀머거리와 같은 병든 의식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은 비단 몇몇 사람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의식의 한 중심에, 그러한 의식이 이룬 높은 산 꼭대기에 독점권력, 독점경제가 자리를 잡고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집권의식은 모든 것을 물리력(재력, 권력, 능력)만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며, 이런한 시도는 곧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야기시키고 더 높은 강도의 폭력이 발생되어 오늘날 폭력의 수위는 사람을 폭행, 린치, 테러, 투석전, 무분별한 최루탄의 난사와 같은 현상까지 와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폭력의 악순환과 치솟는 물리력의 바벨탑 앞에 도시빈민은 폭력의 희생대상인 것이다. 그들은 이 폭력에 대응할만한 아무런 힘도 조직도 갖추지 못하였기에 무분별한 비인간적 폭력 앞에 생존권 저항 이상의 폭력이외는 대항할 길이 없다. 묵묵히 당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 앞에 몸외에는, 목소리 외에는, 양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서있는 이들은 외로운 사람들이며 가진바는 인간성 뿐인 사람들이다. 그 인간성이 재물과 권력앞에 수난을 겪고 있으며 인간성의 수난은 폭력의 악순환을 마무리하고 있다. 폭력을 겪음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종식시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대속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권에 대한 탐욕과 욕심에 의해 폭력이 야기되고, 그 푝력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현실에서 도시빈민은 폭력의 쓰레기를 정화시키면서 서서히 생명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도시빈민의 철거에 의한 수난은 곧 가진자들의 탐욕에 의한 불의를 동시에 고발하있다. 우리 사회의 불의가 없는 자들의 고난을 통해서 드러난다. 도시빈민이 겪는 고난은 이미 고난 그 자체로 가진자들에 대한 고발이지만 이 고난을 통하여 도시빈민들의 의식 또한 정화시켜준다. 즉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통하여 자신들의 의식속에 자리잡고 잇는 물질에 얽매였던 빈곤한 의식에서부터 해방되어 물질로부터, 욕심으로부터 해방된 가난한 의식을 갖게된다. 결국 고난을 통하여 그들이 간직한 인간성이 고양되고 물질에 얽매이지 않은 해방을 맛보게 된다. 또한 무기력과 가난 때문에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진정 함께 가난하게 살고 고난을 겪는 이웃과 순수한 인간성을 바탕으로 형제적 유대를 갖고 그 유대속에서 형제제거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러한 형제적 공동체는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순수한 인간성을 매체함으로 권력이나 재물의 기준에 물들지 않는 가장 기초적인 인간 기초공동체인 것이다. 인간 기초 공동체는 권력이나 재물의 기준을 두고 맺는 단체보다 더 깊은 연대와 더 높은 급의 문화적 틀을 가진다.
세상은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곳이다. 인간은 땅에 두발을 두고 하늘이라는 공간속에서 산다. 인간의 삶은 따을 전제로 하는 공간속에서의 삶이다. 땅을 뺏으면 하늘이라는 공간만이 남는다. 공간속에서만 사는 존재는 죽은 살감. 혹은 유령으로 표현된다. 결국 주거지를 철거하는 것은 따을 빼앗는 것이며, 땅을 빼앗는 것은 죽이는 일과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닌다. 주거의 권리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권리이며, 천부적권리이다. 인간은 살아서 따위에 공간을 두고 생활하며 죽어서는 땅 밑에 공간을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거형태인 집은 단순히 벽을 세워 만든 건물만이 아니라 벽을 통해서 이룩된 공간인 것이다해서 집이라고 하는 것은 집안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공간 집안에서 삶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더우기 그 공간안에 조상의 삶이 존재했고 그 공간안에 현재의 존재자리가 있으며, 태어날 미래의 후손의 공간도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집을 짓는 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세우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짓는 인간화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죽으면 흙이 되는 인간존재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 흙으로 집을 짓는 것이다. 이처럼 주거를 이루는 과정을 인간을 짓는 과정으로 이해해볼 때 우리사회의 주거에 관련된 부동산 투기나 강제철거와 같은 부조리는 곧 우리사회의 인간들이 갖는 의식속의 부조리가 표출된 것이다. 주거에 관한 부조리한 의식들이 철거에 관한 부조리한 의식들이 철거되어져야한다. 건물 중심의 차등적 주거 이해는 공간적 이해를 통해서 극복되어져야 한다.
몇십억을 들여서 지은 공간이나. 판자로 형성한 공간이라 할지라도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각자의 수준에 맞게 잠도 잘수 있고, 쉬고 놀 수도 있는 빈공간을 빈집, 집안이라 한다면 보잘것 없는 좁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삶의 터전이며 부끄럽지 않은 자리인 것이다. 바로 그 공간, 집안에서의 삶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공유되어지는 부분이 자리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도시빈민의 집 역시 도심화나 불량촌 개발이라는 미명속에 강제철거되어 지는것은 불합리하며, 우리사회의 부조리한 표상이며, 인간서을 왜곡, 오염, 파괴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도시빈민의 현실속에서 이 세상의 불의와 부정이 고발되고 있으며 사회구조에 의해 수난을 겪는 대속의 희생제물이 늘어나고 있다. 삶의 전체 차원에서 부조리르 짊어진 도시빈민에게서 가장 구체적인 자가를 짊어진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시빈민들은 가장 작은 이들이지만 하는 미에 의해서 선택된 이들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지혜로운 사람, 부유한 사람을 선택치 않으시고 보잘것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런한 도시빈민들은 위해서 투신한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해서 시작되어지는 것이다. 함께 있다는것이 본인 스스로를 도시빈민으로 만드는데 있지 않고(한명의 빈민이 늘어나는 것일뿐이다) 그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기위해서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는 것이다. 일을 위한 목적 지향적 삶이 아니라 삶자체가 목적일 때 진정한 의미에서 열린 만남이 가능한다. 자선이나 시혜 혹은 복지시설들의 제공을 위한 만남은 결국 일방적인 만남이다. 이러한 만남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 즉 주종의 관계가 형성되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자선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도움이 되지만 자선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반드시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때때로 자선을 받는자를 더욱 무력하게 하거나 끝자리로 소외시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열린 만남은 삶 자체가 공유되어지는 것이므로 수평적 관계가 형성되며, 나눔이라는 쌍방통행의 통로가 개설되어 서로가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독점과 분배는 배척되어져야 한다. 그 필요에 따라 가질바를 정해야 하는 것이지 가진 힘이나 재물에 의해 가질바가 정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힘에 의한 독점은 거부되는 것이며, 강제적 분배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총체적 독점을 전제하고 있음으로 독점의 강화형태일 뿐이다. 자발적인 나눔으로써만이 필요에 따라 가질 바를 정하게한다. 왜냐하면 힘있는 자가 힘대로 갖지않고 필요에 따라 갖게 되면 힘없는 자들 역시 필요에 따라 가질바가 남는 것이다. 따라서 사유화의 기준은 힘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자본의 구조속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구조이다.
즉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임에도 그 물건을 생산하고 생산된 물건을 판매하기 위하여 구매욕을 높이고 선전함으로써 수요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구조는 엄청난 양의 자원을 낭비케되며 모히려 자원낭비를 통해 재화의 독점을 꾀하고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상황의 극복은 분배가 아니라「나눔」인 것이다. 도시빈민들에게 있어서「나눔」이란 재화와 물질의 나눔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있는 삶의「나눔」이며 그들이 누리는「가난」의 나눔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비단 이들이 곤란한 삶의 모습서 동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진바 없는 이들에게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무기력한 이들을 오히려 그 무기력함으로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느끼는 일이다. 더우기 가난한 도시 빈민들이 그들대로의 삶을 나누고, 가난을 나누는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누리는 천상의 복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가난은 강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속에 담긴 순수 인간성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스스로 선택되어지는 문제이다. 가난이란 스스로 버릴 것을 선택하고, 스스로 버림을 택함으로써 벌거벗은채로 하느님의 더운 입김에 의해 따스해진 체온을 알고 느끼는 것이다. 세상은 도시빈민들로 말미암아 따스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부유하고 힘센자들의 문제는 오직 물질과 권력등의 물리적 힘에 의해 해결될수 있으나 가난한 이들의 문제는「가난」의복과「나눔」의 기쁨이 담긴 공동체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작은 힘을 모아 더 큰 물리적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관계에 의해 참된 생명의 힘이 발휘될수 있는 틀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틀속에서 발생하는 삶의 전반에서 사제는 무궁한 영적인 힘을 얻는다.
즉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눈물속에서 제사장직을. 그들의 분노와 투쟁속에서 예언직을, 그들의 해악과 웃음속에서 왕직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서 머리속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야하는 오장육부에서 빚어져 나온 기도를 듣는 것이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미래의 희망을 그들에게 걸지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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