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가리다야.
네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입회한지도 어느덧 한달이 다가왔구나. 그날 수녀원 교육관에서 입회식과 성당에서「말씀의 전례」가 끝나자 너는 다른 수녀 지망생 열한 자매와 함께 곧바로 수녀원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지.
그날 너를 수녀원에 남겨두고 귀가한 아버지는 형언할 수 없이 허전하고 울적했었다. 네가 있을리 없는 네방을 들여다보기도 했단다.「아버지!」하고 금시라도 네가 현관문을 열고 막 들어서는것 같았다.
말가리다야.
그동안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느냐? 어느정도 수련 생활에도 익숙해졌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떠냐? 원장수녀님과 다른 여러수녀님, 그리고 선배 및 동료 수련생들과 이루는 공동체 생활 속에서 늘 명랑하고 겸손하게 지내는 너의 웃음 띤 얼굴을 아버지는 상상해 본다.
말가리다야. 부디 주님에게 기쁨을 드릴수 있는 훌륭한 수녀가 되기위해 인내하며 노력해주길 바란다.
생각해 보렴. 우리는 4대째 이어온 가톨릭 집안이 아니냐? 네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대부터 천주님을 믿어온 우리 집안이다. 네 큰 아버지(故 崔命化신부)는 사제로서 이 나라 교회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기고 귀천(歸天)하신 분이지 않니? 우리 가정이 주님의 축복을 받아 신앙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 올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우리 다같이 감사드려야 한다. 이러한 우리 집안에 이번 너의 쾌거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또 하나의 커다란 온총이 아닐수 없구나.
말가리다야.
수도자의 길이 무엇인지, 아버지가 네게 설명하기란 힘들다. 그러나 네가 수녀되기를 결심하기까지 몇해 몇달을 두고 너의 영혼은 수십번 수백번을 자문자답을 해왔을 것이고 수도자의 길이 어떠한가를 너 나름대로 잘 터득하고 입회했을테니깐.
하지만 아버지가 너를 자랑스럽고 대견스럽게 보는 반면에는 아직도 너를 철없는 소녀로 보는 구석 또한 있단다. 학생티를 아직 못벗은, 응석끼가 아직 남아있는 너를 걱정하고 있는지 모른다. 규율이 엄격하고 만사에 몸조심 말조심 해야하는 수녀원의 공동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가시밭길인지 아버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말가리다야.
아버지는 참으로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장차 어엿한 수녀님이 되었을 때를 상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일국의 대통령을 아들로 둔다해도 무엇이 대단하겠니? 참된 수녀님의 부친으로서의 그 뿌듯함을 생각만해도 감격스럽다.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훌륭한 수녀가 되도록 아버지는 늘 기도 속에 너를 잊지 않겠다. 욕심같아선 기왕에 네가 수녀원에 들어갔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수도자다운 수녀, 주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수녀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을 더럽히는 온갖 잡념, 욕망, 집착, 이기주의 등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자신을 완전히「無」로 돌려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無」가 되었을 때 주님은 채워주실 것이다. 은혜와 은사(恩賜)로 그득 그득 채워 주실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되게 해주실 것이다. 그 다음에는「채움을 받고 채운다」(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의 은혜가 충만히 채워졌을 때 이웃에게도 이것을 나눠줌으로써 남도 하느님 은혜로 충만되게 한다)라는 말대로 자기가 풍성하게 채움받은 것처럼 자신이 몸 담고있는 공동체와 이웃을 채워주고 풍요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깨끗하지 못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완전히 비운 다음 주님의 은혜를 넘치게 담은, 선택받은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넘치게 받은 은혜를 이웃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나눠줘야한다.…
사랑하는 말가리다야!
「십계명」의 첫째 계명인「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라」를 깊이 명심하여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는데 힘쓰며 항상 기도속에 살아가길 바란다. 끝으로 네 큰아버지 신부님이 생존시 수녀님들에게 피정때 강론을 통해「수도자는 먼저 오만과 이기심을 버리고 헌신, 순명해야 한다」고 설파하신 귀한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길 바란다. 또한 이것은 조금이라도 너의 마음을 구속하거나 부담을 주기 위함이 아니고 오직 너를 사랑하고 아끼는 아버지의 충정(衷情)과 너를 위한 순수한 바람에서이다.
그럼 다시 만날때 까지 주님의 평화 속에서 몸 성히 수련생활을 잘 보내기를 바라며 오늘은 이만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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