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군종군신부님의 안내로 광주 보병학교 정문을 들어서자 훈련받는 16명의 신부들은 중대장에게 인계되었다. P 신부님의 모습이 멀어지자 전에 없이 마음이 불안해오고 훈련 생활에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중대장은 우리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짜고짜로『여러분이 사회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던지간에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존칭을 생략하고 후보생이라고 부르겠다. 』이 말이 끝나자 마자 거센 목소리로『앉어』『일어서』명령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저 넋나간 사람처럼 동작을 반복하였다.
입영 전까지만 해도 많은 신자들이『신부님 신부님』하고 불러주던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어제까지 들어오던 신부라는 호칭이 나에게 사라지고 후보생이란 새로운 명칭이 쉽게 적응되지않고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훈련이 시작된지 며칠 지난 어느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식당문을 나오다 교육정인 ROTC 장교와 마주쳤다. 묵묵히 지나치는 내게 그 장교는『후보생 왜 경례하지 않나』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것이 아닌가? 군에서도 당연한 일이건만 동생보다도 나이 어린 그에게 그런 말을 듣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질세라『여XX 갓소위 달고 까불어』하며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동료 신부들이 말려서 커다란 사건은 생기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동생같은 사람과 다툰 사실이 몹시 부끄럽고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연히 모든 사람으로부터 신부라는 호칭을 들어야만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부와 후보생이란 호칭에 대한 갈등이 늘 나를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날 1년전 이곳에서 훈련을 받고 군종사목을 하고 있는 ○신부님이 면회를 오셨다.
나의 어려운 점을 이야기하자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주셨다. 『군에서 생활하려면 계급적으로 가장 낮은 방위 예수님을 만나고 또한, 그분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보게』○신부님의 그 말씀을 듣고 다소 평정을 찾았다.
사람은 각자 자기 신분에 따르는 호칭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위는 죽을때 까지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지위를 의미있게 하기 위해서는 맞갖은 사명감에 충실하게 살아야 되지 않을까. 신부는 신부답게 살 때만이 신부란 호칭이 의미를 갖게되는 것이리라.
호칭에 대한 존경과 대우는 내가 아랫 사람에게 강요해서 억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생활할 때 자연 발생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링컨 대통령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가 대통령 재임 시절에 국민을 위해서 진실되게 봉사하였기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며 추앙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많은 신자들이 보잘 것 없는 나를 신부라고 대우해 주는 것은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구속 공로 덕분이다. 그분의 의미있는 생애를 닮을 때 비로소 나자신이 신부라는 존재가 의미있게 되리라.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나는 나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얼마큼 사랑하고 있는가? 자문해 본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요한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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