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당신이 가신 산정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나폴거리는 꽃잎 사이로 소년같이 웃으시던 당신의 모습이 생시처럼 우뚝 머물러 있습니다. 길잃은 양을 인도하시다가 성당묘지 꼭대기에서 실족하여 그대로 입종하신 당신의 생애.
신부님은 진정한 사제였으며 신부님은 따뜻한 목자였고 신부님은 이 시대 성직의 거룩한 보루였습니다.
금발과 푸른 눈의 선교사로 이땅에 오신지 50년. 한핏줄, 같은 피부도 외면한 춥고 병들고 버림받은 노인들을, 당신의 늙은 자식들이라 여기시며 안타까이 밤을 지샌채 만리타국의 은인들께 구원의 편지쓰시던 인고의 세월들.
호된 극기와 근검으로 겨울에도 냉방에 주무시던 당신의 손은 벗기다만 소나무 껍질처럼 부르텄었지요. 종이 한장 연탄 한장 전기 한등,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아끼고 또 아껴서 오로지 양로자들을 돌보시던 당신. 과로로 쓰러지시기도 여러차례,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라던 주님 가르치심을 한시도 핑계없이 실천하신 일생.「성심 양로원」을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양로자들의 보금자리로 만드셨습니다.
추석 성묘미사를 올리시려던 그 시각에 주님께서도 당신을 천상의 추석잔치에 초대하고 싶으셨는지요.
당신은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어쩌면 일생동안 원하셨던 그 부르심에 기꺼이 나아가고자 그토록 빨리 채비를 하셨다구요.
그러나 혹여라도 급히 가시는 길에 주님 잔칫상에 나가시는 당신 예복에 고운때라도 묻으셨다면 남아있는 우리들이 기도로써 지워드려야지요.
당신의 삼우미사를 봉헌하신 알베르또 신부님의 강론말씀은 슬픔에 잠겨있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답니다.
진정 주님께서는 이 땅에 쌓으신 당신의 거룩한 공로에 상급을 내리시고자 천상에서 급경축하연을 베풀어 드리고 싶어셨나 봅니다. 그러나 우리 머리로 속량할 수 없는 주님 뜻일지라도 그토록 갑자기 당신을 불러가신 일에 서운하고 야속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습니다. 양로원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당신의 손길. 초대 신부로서 당신이 지으신 선산 본당. 가시기 전날까지 노인들의 발걸을을 염려하시며 닦아놓으신 포도원 뒷길. 농장 우리안의 소리들도 뚝뚝 굵은 눈물을 흘립니다.
깨어있을 때나 잠드실 적에도 행여 늙은 자녀들의 면면을 떠올리고 병고와 불편함을 걱정하시던 당신의 기도하시는 은발을 이제는 영영 뵐 수가 없습니다.
아아.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당신은 훌훌 주님곁으로 가셨습니다. 오해도, 질곡도 없는 영원한 안식속으로 당신은 먼저 가셨습니다. 천국에서 양로원 식구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겠지요. 팔월 한가위 속에 우리 신자들 가슴에 당신은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더욱 큰별이 되시어 이 땅을 비추고 지킬 것입니다. 가을과 가을산과 한국을 사랑하신 안스카리오 신부님. 부디 평안히 가십시오.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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