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우선적인 선택』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끔찍히 사랑했는지 알고있다. 그분 주의에는 늘 병신들과 거지들과 과부들과 천한 여인들과 세리들이 있었다. 그분은 하늘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기가 더 쉬울것』 (루까18, 25) 이라고 가난한 사람들을 편파적으로 옹호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그분의 이러한 주장을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들 신자들이 정말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가? 가난한 형제자매들은 하늘나라가 바로 자신들의 것이라니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을것이가.
수십억 이상의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는 교우는 주님의 이 가르침을 핵심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어떤 가르침에 더 큰 중요성을 걸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안정된 직장과 쓸만한 집을 갖고 있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 그런대로 자부심을 갖고있는 나는 주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이와같은 편파적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태도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있어 가난한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동정과 연민과 자선의 대상이다. 예수님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절대적 연민을 가졌었고, 이 연민에서 벙어리와 곰배팔이와 절뚝발이와 장님과 창녀와 과부에서 자비의 손길을 뻗쳤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나의 자선행위와 동정은 칭찬할만한 마음씀이요 지극히 기독교인다운 몸가짐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 가난한 사람들은 최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옹호하셨는데 비해 나는 가나한 사람들을 동정도 하지만 날카롭게 단죄하기도 한다. 가령 나를 포함해서 내주의의 이른바 중산층 교우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까닭은 전적으로 또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탓인것으로 보고있다.
무책임하고 게으르고 무식하고 우둔한데가 있으니까 저모양 저꼴로 살지, 좀 알뜰살뜰 규모있게 열심히 남잘때 잠안자고 뛰어보아라 그래도 가난할까보냐 .우리가 이만큼 사는것도 다 우리 자신이 성심성의껏 노력한 덕아니냐. 가난을 못벗어나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어디엔가 경멸할만한 근성이 있다.
정신상태가 그래가지고야 결코 가난을 못면할 것이다. 모두가 자업자득이다. 대게 이와 비슷한 비판적인 단죄의 칼날이 가난한 이를 바라보는 나와 내 이웃의 눈길에 숨어있다.
가난한 이들의 가난과 비참과 억눌림에 대한 책임의 한가닥이 지극히 간접적일지언정 하여튼 우리 자신에게도 있다는 인식을 나와 내 이웃의 중산충 교우들은 부인한다. 우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많은 것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미안해 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우리들은 노골적으로 반발한다. 오늘날과 같은 우리의 사회 구조에서 그런대로 잘살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롭지못한 사회구조의 덕 (탓?)임을 ─그런 구조 안에서의 개인적인 성실과 노력과 열성이 본의는 아닐지 몰라도 가난한 사람들의 부당한 희생을 조장내지 묵인하는 것임을 우리들은 깨닫지 못한다.
파출부의 하루의 일당이, 공원들의 임금이, 매일 먹는 쌀의 가격이 사실은 부당하게 헐한 것임을, 이런 희생들이 중산층인 우리의 작은 안락의 올과 씨와 날을 이루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설사 어렴풋이 그런 깨달음이 있다 해도 대개는 그것이야 어쩔수없는 것아니냐며 그냥 가볍게 눈감아버린다. 또한 빼앗기고 억눌리고 박해받는 형제 자매들 곧 가난한 사람들의 우선적 해방의 가능성을 믿었던 예수님과는 달리 우리들은 박
해받은 사람들에 대해 특히 심한 결적론적 편견을 갖는다. 억눌림을 받아 온 사람들은 한이 맺힌 사람들이기 때문에 복수심과 증오와 미움을 터뜨리기 쉽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한이 맺혔기 때문에, 서러움과 아픔과 억울함을 당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정의와 용서와 자비의 필요성을 더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을수 있음을 애써 부인하려 한다.
억눌림을 받아온 사람은 증오와 한과 비인간적 야만성에서 행방될 가능성이 그래도 많이 있지만, 억누르는 특권을 누려온 사람들에게는 이런 인간적 해방의 가능성이 정녕 회박함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바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더욱 어렵다는 말씀인 것을 우리는 마음으로 깊이 새겨듣지 못한다. 지역감정이라는 흉칙한 우리의 내면풍경이 드러나는 이 선거의 계절에 주님의 이 경고의 말씀은 더욱 쟁쟁히 우리의 귀를 때린다.
잘못 이해할 여지를 주지않기 위해 애매한 구석없이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한 이 생생한 비유의 말씀으로 믿는가 믿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우리는 정녕 기독교 신자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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