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 10월 11일자 5면「제언」란의 「본당財政ㆍ人事관리 민주화돼야」제하의 기사내용에 전적인 공감을 표시하면서 영원한 참된 교회의 지향을 위하여 신자로서 평소에 느꼈던 몇가지 의견을 말하고자 합니다.
필자의 의견을 말하기전에 먼저, 앞에 말한 「제언」에서 힘없는 평신도 위주의 교회분위기를 위하여 제기된 「신자직능별 등록 및 협동체제」와 「상설바자 실시」등의 의견은 무엇보다 우선하여 교회가 실천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고 있는 방만한 교회의 입장을 실천적으로 재수습(收拾)해본다는 의미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더우기 이 의견은 시행하는데에 재원이 별로 들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도 시작에 어려움이 별로 없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교회가 이같은 협동체제을 본당마다 확립한다면 이는 우리사회에 있어서 놀라운 혁명적인 성과로 사회에 드러날 것으로 믿어집니다. 아울러 이같은 협동체계는 일찌기 조지 오웰이 성취하지 못한 협동체계를 신앙의 힘으로써 성취한 사랑의 승리하고도 점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에서의 이같은 사업은 정부의 정책수행에 경종을 울려줄 뿐만아니라 각계에서 그대로 모방시행함으로써 우리사회를 밝게하는데 큰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當代主義는 교회에도
한 달포전에 卞基榮 신부님은 어느 일간지 기고에서 선배를 깔아 뭉개고 후배를 인정치 않은 우리사회의 당대주의를 개탄한바 있읍니다만 이른바 이 당대주의가 정치ㆍ 경제 사회 문화 등 종교외적인 일반사회의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으로 인식할 수 있으나, 이 당대주의는 우리교회에도 이미 오래전부터 팽배해 있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주임신부가 바뀐 경우거나 각종 단체장들이 교체된 경우에 있어서 전임자에 이어 필히 계승해야할 교회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방적인 비판만 듣고 폐기한다든지 멀쩡한 건물을 헐어버리고 막대한 돈을 들여 새 건물을 짓는다든지 하는 경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워서 공을 세우고 그를 다시 헐어서 공을 세우는 명분없는 부조리는 적어도 교회안에서는 엄격히 배제되어야할 일인줄로 압니다.
최근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아무런 방침의 발표도 없이 장궤들이 점점 소멸되어가고 있습니다. 요즈음 일본에 다녀온 어느교우의 말을 들어보면 일본은 어느 교회에 가도 장궤틀이 없는 교회가 없다고 합니다. 일본이 후진국이기 때문에 아직도 장궤틀이 존재하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면 이 경우도 당대주의의 불행한 산물이라고 여겨집니다.
교회 전례서인 미사통상문에는 엄연히 미사중에 여러번 끓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언제 이 전례서가 주교회의에서 고쳐졌습니까. 장궤는 우리교회 순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밖에도 교회에서의 당대주의의 폐해는 일일이 예거할 수 없을 정도로 허다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당대주의는 얼핏 보아서 과감한 개혁인것 같지만 사실은 회해를 저해하는 비민주적인 독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사회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에 당면하여 교회는 마땅히 교회민주화 대책위원회라도 수립해서 실천사항을 강구해야하지 않을까 절실히 요청되는 것만 같습니다.
○「사랑가 용서」만이
그 다음으로 언급치 않을수 없는 교회의 모순된 현상은 그 정치성이라고 단정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잘못된 교회외적인 현상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다각도로 확인되지않은 경우에는 비판행위를 삼가해야 할 줄 압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교회의 명제는 사랑과 용서이며 그 속성도 사랑과 용서이며 그 궁극적 존재이유도 사랑과 용서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교회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인물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성토의 방법으로 그를 회개케 할수 없으며 사랑과 용서의 방법만이 그를 근원적으로 바꿀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성토를 당하여 교회에 모여든 것이 아니며 사랑과 용서라는 강동적인 규범때문에 교회속에 존재하고자하는 것이라고 명백히 말할수 있습니다. 더우기 성직수도자들이 그같은 근시안적인 비판행위를 서슴없이 행하고있는 경우에 부닥치면 우리 평신도들은 믿음의 열정이 식어져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성직수도자를 포함한 우리 모든 신도들은 남을 성토하기 위하여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것이 아니며 사랑과 용소를 해주기위하여 존재하고 있는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볼때 교회의 시각에서 비판당한 대상의 인물들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사랑과 용서를 해주기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교회의 시각에서 비판당한 대상의 인물들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사랑과 용서라는 무기를 가지고 오히려 그들을 집중적으로 회개케하는 운동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물론 절대다수의 교회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어기지않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유행병처럼 번진 일방적 비판풍토는 일반 사회와 교회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한 양상을 노정하였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최근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나라를 위한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5백여명의 교우들에 대한 정체불명 청년신자들의 폭행은 어느측면에서 검토해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우기 이같은 행위가 어떤 유력교직자의 사전교사(敎唆)에 의한 것이라는 풍문도 있고 보면 교회는 사회상황 못지않게 중대한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본분 인식하고 실천할 때
민주주의는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우리가 굳게 신봉하기 때문에 정치민주회에 대하여 교회가 촉구해온 것은 어느 의미에서 수긍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민주화라는것은 각 분야 사람들이 본분이 무엇인지 인신하고 또 그 본분을 실천할 때에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이제 그 본분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될 시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기상천외의 말이나 방법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앞서말한 바와같이 「사랑과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규법은 마치 몇백년후에 효과를 나타낼 조림(造林)과 같은 것이어서 인식은 되면서도 실천은 어렵고 답답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교회는 2천년동안 그것을 추구해 왔습니다. 공산주의같은 돌출적인 기형아의 발생원인을 분석한다면 교회가 이규범을 이탈한데서 그 까닭을 찾을 수 밖에 없을줄로 압니다. 교회의 정치행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명백한 명분은 정치란 일시적인 성토와 물리적 개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변증법적으로 보면 그같은 행위는 또 다른 성토와 투쟁을 수반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같은 진리 아닌 진리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고 절실히 외쳐보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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