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12월초 마닐라에 있는 아세아 사목연수원(EAPI) 큰 방에서는 이색적이고도 감동적인 미사가 봉헌되고 있었다.
8폭의 산수화 병풍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의 영정(사진)을 중심으로 향로, 떡, 과일 등으로 차린 제사상 앞에 두루마기와 한복에 영대를 맨 6명의 한국 사제들이 드리는 미사였다.
촛불만이 어둠을 밝히는 침묵의 밤, 대금의 청아한 가락이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참례자 80여명이 (임원및 27개국에서 모인 연수자들) 한 사람 씩 나와 분향으로 시작하여 신자들의 기도까지도 소지하는 등 (기도를 쓴 종이를 태우는 예식) 한국의 제례형식을 도입한 미사였다.
우리나라의 정치ㆍ경제ㆍ사회종교ㆍ문화를 소개하는 한국주간 마지막 날에 봉헌된 이 미사는 대찬사를 받았다.
그 나라와 종족의 문화와 전통에 바탕을 둔 전례의 쇄신과 발전 곧 전례의 토착화를 중심으로 련대 사목을 연구하는 세계 유일의 사목연수기관인 이 곳에서 매주 2~3회시씩 새로운 전례들이 시도되는 이 곳에서 봉
헌된 한국식 미사가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은 기쁜 일일뿐 아니라 문화국민으로서의 긍지를 느끼도록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토록 좋은 문화와 전통을 전례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 부끄러움과 아쉬움도 함께 느꼈다.
전례는 하느님과의 만남,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매체이며 신앙과 신심의 원천인 동시에 구원의 표지이다.
공의회는 전례헌장 서문에서 전례의 본질과 중요성, 그리고 그 우월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직 수행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안에, 특별히 전례 행사안에 현존하신다.
전례의식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성교회의 행위인 까닭에 가장 우월하고 거룩한 행위이며 그 효과에 있어서도 성교회의 어떤 행위도 이와 같은 자리 및 비중을 차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어서 『신적제정인 연고로 변경할 수 없는 부분』 이외에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경해야할 부분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실정에 따라 새로 첨가하거나 사제함으로써 토착화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즉 『로마식 전례의 본질적 통일성을 보존하는 조건하에 단체, 민족지역, 특히 포교지방에서 합법적 다양성의 길을 열어』 (전례헌장 21, 37, 38항) 전례가 그 지방의 문화와 융합하여 발전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공의회 문헌이 선포된지 22년, 많은 부분이 쇄신된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도 로마식 전례의 복사판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채 시정되어야 할 것은 시정되지 않고 새로 제정한 기도문 등이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도리어 복잡한가 하면 한국의 문화와 상반되는 것들도 허다하다. 몇가지 예를 들겠다.
상례 (喪禮) 와 제레 (祭禮) 의 경우.
⊙장례미사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장례미사는 망자의 영생을 기원하고 유가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의식 (儀式) 임으로 평화인사가 삭제되어야 함에도 아무런 주석이 없어서 그대로 시행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명정과 묘비에 僞人OOO 僞人이란 유교를 믿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런데 품계, 관직, 성씨 등을 나타나는 명정과 묘비에 그것도 세례명 위에 僞人 OOO라고 쓰는 분들이 많다.
마땅히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제자라는 뜻으로 聖徒라고 쓰든지 순수 한글로 하느님의 아들ㆍ딸 아무개라고 써야할 것이다.
⊙연도 드릴 때 주님을 「너」라니.
현행 성교예규에 의한 위령 기도문을 보면 차마 듣기 민망한 글귀가 연달아 나온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너』 (소유격엔 『너의』) 라고 부른다. 존칭어가 없는 알파벳 언어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한국어법으로 볼 때는 어른들께「너」라는 말은 개똥상놈들도 안쓰는 말귀다. 그런데도 늘 습관적으로 드려온 기도이기에 거부감을 못느끼는 것이다.
10여년까지 외우던 천주경,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 신자여네 이름이…』라고 지금도 쓴다면 어떻겠는가?
음율이나 감성전달에 뛰어난 효력을 갖춘 연도 따라서 「주의」로 고쳐야 할것이고 성모님의 경우 주격과 호격은 「성모는, 여」로 소유격은 「성모의」로 고쳐야 할것이다.
상례는 어느 국가나 민족이든간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현재 한국에서 연도 등 가톨릭 상례와 제례가 단순히 기도의 차원을 넘어 선교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감안할때 빨리 시정되어야 하겠다.
⊙고백성사의 사죄경
사죄경의 엣센스는『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합니다』이다.
그런데 새로 제정된 사죄경은 사제나 고해자 숫자가 많아 시간관계로 고해를 다 주지 못하는 경우 (주일ㆍ대축일) 와 문맹자가 기억력이 약한 노인 등 사목상 현실적 애로와 실정을 무시한채 이상에만 치우쳐 만든
것이다. 따라서 종전의 것으로 환원해야 마땅하리라고 여겨진다.
지금까지 전례상 시정해야 할 사항 몇가지를 적었다. 물론 이것은 지엽적일 수도 있다.
필자가 제언하고자 하는 것은 정양모 신부님이 본란을 통해 우리 한국교회엔 『한국적 신학이 없다』고 지적했거니와 한국교회엔 전례의 토착화를 위한 상설 내지는 전문연구기관이 없기에 예수님의 행위요 교회의 행위며 신심의 원천이 되는 전례가 인습내지는 로마식 전례의 복사판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속히 상설 내지 전문전례기구를 창설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미풍양속으로 권장해야 할 재래식 제례가 미신으로 여겨져 박해의 원인이 되었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토착화가 안됨으로 발생한 참극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민족의 지혜문학마저 그들이 종교와 문화로 융합시키고 배양시켜 훌륭한 지혜문학성서를 창출했다.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와 훌륭한 문화유산을 갖고있다.
세계제일의 성장도를 자랑하는 한국교회! 이렇게 좋은 여건을 갖고 있는 교회가 빛나는 문화와 전통을 활용하여 전례의 토착화를 이룬다면 선교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신자들의 신심도 더욱 깊어 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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