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미술
인간은 생각이나 사상, 느낌 등을 표현하는데 여러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 방법중의 하나인 미술은 조형을 하는 행위로서 건축을 하거나 그럼을 그리거나 조각 등을 하는데 있어 조형언어라는 원리에 의하여 표현된다. 이 원리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본래 사람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원리는 하느님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조형언어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우리의 영혼을 표현하는 언어이다. 이 언어는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교회를 아름답게 꾸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복음화하는데 찬탄할만한 업적을 남겼고 교회와 더불어 변모하여 왔다.
서양에 있어 교회미술의 시작은 교회가 박해로 인하여 지하에 숨어 있을때인 까다꼼바에서부터이다. 초기에는 그 표현이 치졸하였으나 마치 작은 겨자씨처럼 성장하여 융성하기도 하고 한때는 쇠퇴하는 등 교회미술의 특별한 양식을 이루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교회와 더불어 변모하면서 표현들은 그 시대의 교회양상이나 사람들의 깊은 신앙심까지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기록들로써 교회내에서뿐 아니라 인류의 유산으로서도 값진 것이다.
교회와 오늘의 미술
현대에 이르러 많은 문화가 참다운 인간의 걸어야할 위치에서 벗어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정의를 밝혀내고 옹호하는 길밖에서 맹종함으로써 교회와의 거리를 멀리하고 신앙에 대한 인간의 신뢰를 저버리는 경향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점에 있어 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그와 같은 경향은 인류문명이 급격하게 발전한 20세기초부터 심화되었는데 그 두드러진 경향은 강력한 개성의 표현과 전통적인 사고의 붕괴 많은 실험적인 행위들로써 보편적인 미술의 정통성을 찾기 힘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회는 현대 미술의 수용을 주저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현대미술이 그릇된 것은 아니다. 주류를 이루는 탁월한 미술가에 의하여 오히려 옛보다 더 본질적이며 근원에 접근하고 옳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정통을 이어가고 있는것은 희망적인 것이며 앞날이 결코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교회내의 미술인들이 생각해야할 우선적인 과제는 미술의 세계가 얼마나 인간의 심오한 사상과 심각한 현실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앞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복음화하고 있느냐에 있을 것이다.
한편 교회는 미술의 외면적 형식을 보기에 앞서 그 사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이며 그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떻게 지헤롭게 대처하고 있느냐를 생각해야 할것이다.미술의 역할이 교회를 장식하는데 있지 않고 미술을 통하여 이시대의 정신과 신앙심을 표현하는데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것이다. 그 표현이야말로 미술이 교회에 참여해야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미술
이처럼 단순치않은 현실에서 한국 교회와 미술을 바라보고 한국 교회미술의 앞날을 생각하는데 있어 어려운 점은 교회내의 미술의 역사가 일천하다는데 있다. 우리 교회의 역사가 이백년이라하나 교회가 우리 손으로 이룩된 미술을 접하게 된 것은 1925년경 아직도 생존해계신 장발씨가 명동성당 제대 뒷편에 열두사도의 성상과 김대건 신부상이나 성콜롬바 성아녜스 등을 그린 것이 처음 이루어진 교회미술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교회의 건축도 몇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고딕식의 첨답만을 모방한 빈약한 것들이며 통속적인 상품으로 만들어진 성모상, 아무런 정신적인 가치가 없는 예수성심상, 십자가 등으로는 이것이 성물을 통하여 느끼는 예수님의 모습과 성모님, 교회의 전부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상상속에는 통속적으로 그려진 서양얼굴과 모습을 한 예수님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소수 미술품들이 교회에서 시도되고 있으나 앞날은 실로 요원하다.
미술과 주체성의 문제
우리는 유구한 역사와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사상에서 우러난 우리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이러한 문화는 외부의 여러가지 영향을 받으면서도 단절되지 않고 유지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 전통의 핵심에서 참인간의 길을 찾아 헤매는 길목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들 가슴 속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그들식으로 맞은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주체속에 참주인을 모신 것이며 그로 인해서 그 주제는 보다 보완되고 뚜렷해졌다. 이제는 더이상 그리스도가 외래종교의 주인공이 아니며 우리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우리의 주인을 우리식으로 만들어 표현하고 우리식으로 대접하고 찬송한다는데 아무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우리손으로 조형함으로써 더욱 그리스도는 우리의 그리스도답고 우리 교회다운 것이 된다.
그러나 궁궐같은 기와집을 짓는다든가 갓을 쓴 예수님이나 한복차림의 성모님 같은 외형의 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주체는 과거의 고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밖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예 것이나 새로운 것이나 할것 없이 수용하는데서 보다 뚜렷해지고 강건하며 보편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토착화는 이러한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유산을 보다 풍요롭게 하며 보다 우리다운 것으로 창출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당이나 성모상은 지금까지의 어느것보다 새롭고 신선하며 참으로 나 다우며 모든 사람이 보고 또 보며 기뻐하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진정한 우리의 미술이 될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토착화의 과정은 장구한 세월을 두고 이루어야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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