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을 다같이 사랑하고 만민을 구원할 사명을 띤 교회로서는 가능하다면 중립지대에 서서 자본가와 노동자 및 가난한 이들을 함께 포용해야 하겠지만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고, 어차피 한편을 선택해야한다면 둘 중 어느쪽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는다.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기로하는 우선적 선택』이라는 표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말이 바로 이와같은 마르크스식 논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물론 그 반대자들이 생각하듯이 마르크스주의의 논리에서처럼 한편(자본가나 기득권자)을 제외하고 다른 한편(노동자 가난한 이 소외계층)만을 배타적으로 편드는 식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점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84년 훈령은 기회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를 역설한다. 예를들어 9장 9항은 이렇게 말한다.『「가난한 이들의 교회」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이해하자면 어떤 형태의 인간적 비참상이든간에 이를 안고있는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우선적으로 돌보시는 사람들이므로 여타의 사람들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보이이지 않으면서도, 이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입장을 의미한다』
또 84년 훈령 5장 6항에서는 푸에블라문헌에 규정되어 있는「우선적 선택」이라는 문제의 그 표현이 원래는 가난한 이들뿐 아니라「젊은이들」에게까지 적용되던 것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이 표현을 맨먼저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던 그 문헌속에서는 계급 투쟁이론에서 문제가 될 수 없는 젊은이들까지도「우선적 선택」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84년문헌은 문제의 표현이 계급투쟁적 논리를 반영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가난한 이들의 편에서기로 하는 우선적 선택』이라는 표현에서「선택」이라는 말이 언뜻 생각하기에는 어차피 한쪽을 버리지 않을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한쪽을 택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교회의 진정한 의도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성권력에 유착하여 여러가지 특권을 향유해 왔음을 스스로 인정하며, 이제부터는 그런 입장에 결별을 고하고 결연히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기로 결단을 내린 남미교회의 가장 권위있는 대표기관에서 처음 사용한 이 표현을 세계보편교회를 상대로 내린 훈령을 통해서 교황청이 공적으로 채택했다고 하는 사실은 의미심장한바가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표현과 그것이 대변하는 정책을 둘러싸고 1968년의 메델린회의 이래 남미교회가 심각한 분열의 위기를 겪을 정도로 큰 물의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택했다고하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반대자들의 신랄한 비판이 충분히 예상되고 실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공식 문헌에서 채택했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그들의 권리를 쟁취함에 얼마나 적극적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실이다.
이 문제의 표현이 얼마나 큰 물의를 일으킬 소지를 그안에 내포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사실이있다. 다름아니라 84년 훈령의 후속문헌으로서 86년에 나온「그리스도교적 자유와 해방」이라는 훈령은「가난한 이들의 편에서기로 하는 우선적 선택」이라는 표현에서 한두마디를 다른 단어로 대치시키는 세심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해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논리를 연상시킬 염려가 훨씬 덜하거나 전혀 없는 다른 표현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문헌은 68항의 제목에서「선택」이라는 말대신에「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여「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 68항의 본문에서도「교회로부터의 우선적 사랑」이라는 말과「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기로하는 특별한 선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특히 이 두번째 표현은 푸에블라문헌에 이어 84년훈령에서 채용한 표현에 비해 단어 하나의 차이 밖에 없다. 즉「우선적」이라는 말대신「특별한」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것이다. 이처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만큼 마르크스 주의의 논리를 깔고 있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다분한 표현을 채택했다고하는 사실은 지금 남미와 같은 지역에서 교회와 마르크스주의가 얼마나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엿보게 한다.
6, 마르크스주의와 무신론
마르크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내지 그 사이의 공존가능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는 무신론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무신론적인가? 아니면 그 안에서 무신론은 역사적 상황이 결정적 역할을 한것이기 때문에 형이상학내지 존재론적 수준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무신론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수 있는가하는 점이 우리 관심의 초점이다. 이제부터 이 문제를 알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후 엥겔스나 레닌 또 모택동같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이 예외없이 무신론자들이었음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무신론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는 실제에 있어서도 무신론을 본직적인 부분으로 가지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무신론을 빼버리면 그것은 이미 마르크스주의가 아닐 수 밖에 없는가? 만일에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도대체 문제로서 설정될 여지조차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무신론이 과연 본질적인 부분인가의 여부를 알아보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 제일 먼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있다. 마르크스주의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무엇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신앙이냐 하는 문제와 같
이 꼭 맞는 객관적 규준을 설정하기가 쉽지않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신앙을 판별할 기준으로서 5세기의 신학자 레리노의 빈첸시오가 제안한 바를 본떠서,『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해온 것』이 마르크스주의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무신론과 유물론은 그 안에 본질적 구성요소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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