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의 막중한 사목 임무와 교회사업 규모에 따라 오래 전부터 보좌주교의 탄생이 고대되어 왔던 바 이번에 경갑룡 보좌주교가 새로이 임명된 일은 우선 크게 경하할 일이다.
서울대교구는 우리 한국의 수도권 교구일 뿐 아니라 역사상 한국 천주교회가 첫 터전을 닦은 고장이다. 이조 실학자들의 천주교 연구와 명례동 가교회 설립을 통해 한국 초대교회가 이 고장에서 뿌리를 내렸다. 또한 현재로서도 서울대교구는 한국 내 타교구들에 비교하기가 힘들 만큼 월등한 교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안에서 서울대교구는 천주교를 대표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임 경 주교의 사명은 또한 막중한 것이다.
서울대교구 교구장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한 분뿐인 추기경이므로 전국 교회의 상징적 정상이며 세계 교회 안에서의 역할이 있는 만큼 실질적으로 교구 일을 거의 전담하여 관리해야 될 분이 경 주교라고 생각된다.
앞에는 모든 여건들을 종합하여 볼 때 신임 경 주교에게 특별한 기대와 요망을 보내게 된다. 그에게 거는 기대는 결국 그에게 요망되는 일들이 선처되는 데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 이 상황에서 경 주교에게 보내는 요망들이란 의례적이고 타성적인 관념을 벗어난 것들이라야 실질적으로 의의가 있을 것 같다.
타성을 벗어난 의견이란 때때로 이상에 치우쳤다거나 너무 기발하다는 인상을 주기 쉬우며 따라서 이런 요망을 받은 분이 그것을 실현해야겠다는 구속감을 느끼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처럼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자리에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계기에 새로운 차원의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서 신임 경 주교에게 드리는 요망 사항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본다.
첫째, 가난한 교회를 지향할 것. 서울대교구는 신자 수와 신자들의 경제적 수준이 높아서 재정 규모가 타교구들에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다.
그리고 교구 내 성직자들의 일상생활은 아무튼 시골 교구의 성직자들보다는 윤택한 편이다. 그러면서도 또 교구 내 제정 운영 사정의 전반을 볼 때는 예산이 크게 부족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순환 관계에는 무언가 잘못된 요인이 있을 것이다. 이 요인으로서는 우선 신자들이 자신들의 생활 수준에 비하여 교무금과 미사 헌금을 불성실할 정도로 적게 내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이 점은 개신교 신자들의 헌금 규모에 비교해봄으로써 명확해진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그나마의 윤택한 환경 안에서 안일과 나태에 떨어지고 심지어 사치한 취미생활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 교회 공동체의 영성이 메말라가지 않나 생각된다. 성직자들이 가난으로써 영성의 모범을 보이고 신자들은 돈을 더 내서 교구 재정 사정을 호전시키고,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시골 교구들에 부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 특히 무슨「자매결연」이라도 맺어가며 가난한 벽지 본당을 도와야 한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부를 사랑으로써 나누지 않을 때 외부 사회나 국제 사회의 빈부격차현상을 비판할 권리가 없게 된다.
둘째, 사회 속에 살아있는 교회를 지향할 것-. 교회가 아무리 거룩하고 정의로와도 교회 울타리 안과 신자 가정 안에서만 그렇다면 이 사회는 계속해서 혼탁해 갈 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가정과 교회 밖에서 훨씬 큰 위력을 지닌 기구들을 가지고 있다. 정당ㆍ매스콤 기구ㆍ법조계ㆍ학계ㆍ문단ㆍ노동조합, 이런 사회 기구들과 교회가 적어도 소통이라도 되고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유력한 평신자들을 교회의 손발처럼 활용할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본당 사목위원회를 모아 교회 살림살이나 걱정하기에 급급하고 있다면 누가 실질적으로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것인가.
셋째, 국가 장래를 위한 예언자가 되기를 지향할 것. 교회의 사회 참여와 정치적 시국관에 있어 성직자 신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다든가, 다른 견해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한다든가 하는 정도의 정체된 논란은 끝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성서 안에 있는「의를 위한 예언자 정신」과 근대 교회의 대사회 교황 회칙들이 명시하는 자유, 인간 존엄, 사회 정의, 공동선 등 자연법적 실천 원리들을 교회 내외적으로 부단히 계몽하면서 이 원리들을 실천해 나가는 신념이 필요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된다.
위에 든 요망들을 한 신임 주교에게 몰아서 제기한다는 것은 너무 벅찬 주문이며 실상 이것은 한국 교회 전반이 책임질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와 같은 사정을 서울대교구 신임 보좌주교에게 털어놓는 것도 부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모든 일을「하느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무래도 매우 구체적으로 상기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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