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세느강이 1천 년을 쉬지 않고 흐르는 동안 이 노뜨르ㆍ담 성당도 사실은 그 밑바닥에서부터 풍화작용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전무후무한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만 남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막 한가운데에 나타난 신기루 같이 우연한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모되어 그 한계를 드러내기는 하였으되 역사의 모든 주름살을 가장 종합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보물임에 틀림없다. 특히 그것은 현대적인 것에로 연결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한다. 다시 말하자면 꼬딕성당의 종합에서 한 가지 요소씩을 제거하면 현대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우선 이 꼬딕성당에서 초자연적인 것과 종교적인 요소를 제거하면 인간적이 것과 자연적인 것과 공학적인 것만이 남을 것이고 (르네쌍스 이후) 다음에 거기에서 또 다시 인간적인 것의 자취를 제거하면 자연적인 것이 남게 될 것이고 (19세기) 또 다시 거기에서 자연적인 것을 삭제해 버리면 기계공학적인 것만이 남을 것이다.「빠리」의 에펠탑에는 아직도 자연미 같은 것이 남아 있으나「뉴욕」의 UN본부 삘딩에는 다만 직선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꼬딕성당에 종합되어 있던 조각ㆍ회화ㆍ장식 그리고 음악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 완전히 사라졌거나 분산되고 만 것이 이른바 현대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중세와 꼬딕과 현대를 단절시키는 견해보다는 편견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은 현대는 나쁘고 중세는 좋다거나 혹은 현대를 중세로 역행시켜서 환원해야 한다는 것과 거리가 멀다.
되도록 편견을 떠나는 것을 유일한 편견으로 삼고 싶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이나 신학 그리고 꼬딕 양식의 성전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그것도 훌륭하고 고귀한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자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의 것을 절대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의 체질에 맞는 말로 표현하자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일장춘몽」이 아닌 것이 하나도 어디 있겠는가. 역사는 꿈이 아닐 것이다. 설사 꿈이라 할지라도「일장」만으로 끝나는 꿈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무수한 꿈이 가능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세대 혹은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시대가 아니겠는가. 만일 이것을 거부하는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일장춘몽」을 영원화하고 절대화하려는 심산이라고 단정해도 좋지 않겠는가. 아무리 아름답고 고귀한 과거도 과거는 꿈은 꿈이 아니겠는가. 대체 종교니 신앙이니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성당」이 아니라는 것만은 명백하지 않겠는가.
「성당」은 반드시 예술품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훌륭한 성당은 예술품일 수도 있다. 꼬딕 양식의 성당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빠리」의 노뜨르담성당은 분명히 예술적인 보물이다. 그래서 현대 사람들은 대부분이「빠리」의 노뜨르ㆍ담하면「가톨릭」보다는 예술을 먼저 생각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경주의 석굴암을 향해서 관광객들이 몰리는 현상을 보고「예술은 길고 종교는 짧은가」하는 문제를 생각해본 일이 있다.
왜냐하면 석굴암을 찾는 사람의 관심은 불교가 아니라 예술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적인 신앙은 사라졌어도 예술에 대한 사랑은 길이길이 남아 있다. 이것을 종교에 대한 경의로 착각하고 그러한 TV 드라마 작품 혹은 신문 기사의 필자에게 감사장을 증정하는 광경은 웃을 수가 없을 만큼 부끄럽고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사실「예술은 길고 종교는 짧은 것」일 수가 있다.
종교와 예술은 동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아무리 훌륭하고 천재적이고 초인간적이더라도 종교의 모든 것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는 언제나 예술을 벗어난다. 종교는 예술의 모체이기는 하나 예술과 동격은 아니다. 예술은 종교의 일각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술도 생명이 있다고 하지만 종교는 예술보다 더욱 높은 생명을 한 까닭을 모방하는 것뿐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눈으로도 그 전체를 볼 수 있으나 종교는 그렇지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속아 넘어가고 있다. 예술 속에 종교가 있는 줄 알기 쉽다. 종교적인 예술 작품에 담긴 종교가 그 종교의 전부인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할 때는 이미 그 종교적인 것은 예술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고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찾아서 옮겨간 다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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