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禪家)의 화두(話頭)에 한고추(閑古錐)란 말이 있다. 끝이 닳아서 무딘 송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무엇을 좀 안다는 지식인이나 남의 윗자리에 앉은 사람 중에 서슬이 푸른 사람이 많다. 마른 갈대처럼 푸른 칼날을 번득이며 바람이 일 때마다 몸을 흔들면서 주위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하고 상처를 내는 것이다. 서슬이 밖에 드러나는 사람은 아직 길이 덜든 송곳처럼 끝이 날카롭다는 뜻이니 자신의 미숙함을 스스로 나타내는 일.
小雪을 지나 겨울이 바짝다가드니 거리의 발걸음들이 한결 빨라졌다. 제각기 자신이 벌려놓은 일을 마무리하느라고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우리라. 한햇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고. 이루고 베푼것도 없이 저무는 한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새삼 가난한 발밑이 내려다 보인다. 그러나 우리같이 범속한 사람이야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베풀었겠는가. 자기 한몸도 가누기가 어려웠다.
내가 생각하는 아집이나 독선 때문에 이웃의 마음을 상하게하지나 않았는가. 자만이나 편견으로 일을 그르치지는 않았는가. 내 자비심이 모자라 좋은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되지는 않았을까. 후회와 반성의 시간이 길어질뿐이다.
어제는 때이른 눈발이 날리더니 가지에 몇남은 나뭇잎들이 가뭇없이 저버렸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늘로 뻗은 가지만이 추운 바람을 이기고 있다. 사람도 저와 같은것임을 비로소 알겠다.
이러한 때 사람은 세속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서 자기 자신에게 눈을 돌리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이 고독한 시간이 사실은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삶의 순간이 아닐런지. 자신에게로 돌아와 저만큼 우두커니 앉아있는 또하나의 모습을 들여다 보라. 한없이 고독하고 연약한 존재가 아닌가. 무엇을 좀 안다는 것이나 남의 윗자리에 앉았다는 것이 그 본래존재의 쓸쓸함에 비교한다면 다 무엇이겠는가. 한때의 푸르름을 자랑하던 여름날의 저 무성했던 나뭇잎이 아니겠는가.
사는 일은 눈물겹고 눈물겨운 일이다. 어찌 푸른 서슬을 내보이겠는가. 閑古錐, 날카로운 송곳 끝을 제 살에 문질러 무디게 할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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