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제주도 여행을 가서 제주시가지를 처음 보고는 실망을 한 일이 있다. 육지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니만큼 그만큼의 독자적인 문화를 도시의 외형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지니고 갔는데 현실은 그 기대감을 거의 채워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여자 안내원의 말이 비로소 제주에 왔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맨드롱 따또 호로록 드리써 봅써』『폭삭 소가수다』『늘멍늘멍옵써』『도르멍 도르멍 갑써』등등의 말들이 전혀 생소한 것으로 다가왔다. 아니 생소하다기 보다는 「늘멍늘멍」(놀면서, 천천히)이나 「도르멍 도르멍」(달리면서, 빨리빨리)같은 날말을 곱씹어 보면서 신선한 맛을 느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표준어로 삼고 있는「천천히」나「빨리빨리」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서 정감이 더 갔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이런 아름다운 말들이 경상도로 넘겨져서 경상도 말의 굳어있는 자리가 부드럽게 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경상도에 머물게 할 것만도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로 동시에 넘겨졌으면 하는 생각도 이어서 했다. 역으로 전라도 충청도의 아름다운 방언이 다른 지역으로 흘러 넘어가서 그곳의 말생활을 넉넉하게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그런 기대감에 부풀어 오르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디 말뿐이겠는가 싶다. 그 지역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이룬 독특한 문화전반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이라면 더없이 좋겠기 때문이다. 이런 희망은 한 지역의 문화가 그것대로 건전하고 독창적일 때 다른지역의 문화를 깁고 증진시킬수 있으며 또한 다른것과 더불어 개성있는 나라 문화를 이를 수가 있다는 그런 믿음에서 오는 것이다. 저간에 관심을 불러일으켜 온「지방문화」「지방화시대」「지방자치제」등의 말들이 설득력 있게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지역감정이 대두되어, 나라가 심한 몸살을 앓고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까닭이 어디있든 지역감정은 나라의 힘을 빼고 병들게 하고 끝내는 뒤엎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암인 것이다. 이 지역 감정으로 인하여 참다운 지방문화내지 건전한 지방색이 죽거나 굴절되게 되었으니 걱정스럽기 이르데없다. 지역사람들이 지역감정에 매이면 지역 밖의 것에 배타적이되어서 급기야는 지역파당을 만들거나 그 대열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동참하게 된다. 그렇게되면 그 지역이 이루어내는 문화는 파당에 봉사하는 왜소한 것이 되거나 감정에 좌우되는 저급문화로 전락해 버릴것이다.
파당을 만들거나 거기에 빠져버리는 예를 우리는 종종 생활 주변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무슨 무슨 동참회나 향우회로부터 동갑계에 이르기까지 소비 지향의 파당에 떨어져 버린 경우를 얼마든지 우리는 접할 수가 있는것이다.
물론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단체들 가운데는 자기 집단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사회 공동체에 크게 이바지하는 건전한 것들도 많이 있다. 이런 단체는 대개 다른 단체나 집단을 인정하고 상호교섭하는 것으로 보며 미움을 받고 키워주는 공존의 자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늘 대의나 가치에 우선하는 집단이다.
사실 예의 그런 단체나 크고 작은 갖가지의 공동체가 그것으로 존재하는 까닭은 그단체나 공동체를 초월하는데 있다. 더 엄밀히 말하면 개인적 사고나 판단의 오류를 기워주고 바로 잡는데 있고 그들 공동체의 이해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가특정 부류의 편익이나 시한성이 있는 일에 매이면 그 일의 한계점에 이르러 종파로 전락하게 된다. 이럴때 종교 문화도 창조성이나 보편성이 아울러없어지는 무익한 문화가 될 것임이 자명하다.
어쨌거나 단체는 지역 단위 공동체든 사회 공동체나 나라 공동체의 이상을 깨는것이 되면 들어서는 것이 된다.
이 길목을 과연 누가 지켜서야 하는가? 아니 누가 지켜서서 어찌해야 하는가? 그 답은 이렇게 할 수 있다.『공번된 교회의 백성들이 지켜 서야하고 그길목에 지켜선 사람들이 최소한 자기를 지키는 일에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라고. 성서에 적힌대로『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에페소6, 14~16)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종과 지역과 계급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오셨다. 오셔서 보잘것 없는 우리들을 자녀로 삼으셨다. 참으로 황홀한 사랑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지도에는 눈을 닦고 보아도 지역 경계선이 없다.
파당 그린벨트도 나타나 있지를 않다. 대신에 사랑으로 수놓인 지역 문화의 선명한 문채들이 어우러져 있을 뿐이다.
아, 그러니 기도를 빠트릴 수가 있는가.『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신 주여 감사합니다. 우리는 자주 당신의 자녀임을 잊어버리고 당신이 가르쳐주신 것과는 정반대의 길에 들어서기가 일쑤인데 지켰다가 우리들을 제자리로 되돌려보내주십니다. 당신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지역감정이나 파당에 빠져드는 이들의 길목에 서게 해주십시요.
그리하여 이들과 함께 우리 자신들도 참으로 도르멍 도르멍 제자리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강희근
◇43년 경남산청生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경상남도 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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